전광용의 단편소설 <꺼삐딴 리>는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인성을 가진 인간이 ‘배우고 가진 자’로 살아가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소설 <꺼삐딴 리>는 일제 강점기 후반부터 대한민국 수립 초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이인국 박사는 일제 치하에서는 친일파, 해방 이후에는 친소련파, 미 군정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친미파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이인국 박사의 내면에는 애국심이나 민족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인국 박사의 머리에는 지켜야 할 신념이나 사상도 없고 오직 일신의 안녕을 위한 냉철한 계산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인국 박사에게 있어 삶의 모든 요소는 자기  보신과 사리사욕의 충족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의 친일파가 오늘의 친소련파, 친미파로 탈바꿈하는 세상에 자기 하나쯤 더해진들 어떻겠냐는 생각으로, 이인국 박사는 자신의 행동을 뻔뻔스레 포장하고 정당화시킨다. 이인국 박사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일제 강점기 치하의 친일파라는 개념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의 전형이다. 이인국 박사는 소설의 주인공, 가공의 인물에 지나지 않지만, 역사적 현실에서 외세에 의해 국권이 침탈당하고 자국민이 고통받던 시절, 불의와 폭력에 항거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허리를 굽힌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부끄럽고 슬픈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근현대사에는 이인국 박사같이 탐욕스런 인물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명문가의 후손이자 조선 10대 부호에 드는 유력 가문의 일원이었다. 배움과 가짐의 정도가 당시 나라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가진 자 중의 가진 자’였다는 말이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 당하고 혼란해졌다고 해도 배움이 있어 국제 정세에 대한 기본 이상의 이해가 있고, 가진 재물이 있어 강자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여력이 있던 자들은 강자이자 착취자인 일제의 편에 서기 일쑤였다. 일제의 수족이 되어 적극적 친일을 했던 자들은 호의호식하며 안락하고 평탄한 삶을 누렸다. 그러나 이시영과 그의 일가는 불의에 허리 굽히지 않았다. 이시영과 그의 일가는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응하지 않고 가문의 모든 재산을 처분한 뒤 만주로 이주했다. 이때 재산을 처분한 돈이 당시 소 값으로 1만 마리가 넘는다고 하는데, 당시 소 한 마리 정도 있는 것이 먹고 살만한 집의 기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막대한 액수인지 가늠할 수 있다. (급히 처분하느라 제값을 받지 못한 것임에도 그 정도이다.) 이시영 일가는 막대한 액수의 돈을 모두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는 데 썼다. 이시영 일가는 만주 신흥강습소를 신설해 독립군 양성자금을 대기도 했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활동에도 참여해 독립과 독립 이후를 대비하기도 했다. 가문의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썼기에 이시영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대단히 궁핍한 생활을 했는데, 이시영의 형제들이 아사, 객사, 병사했을 정도다. 사회적 지위와 부, 배움을 최고 수준으로 가졌음에도 나라와 민족이 고통받을 때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았다는 점에서 이시영(그리고 그의 일가)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고도 불린다. 친일파 청산이 진행되면서 밝혀진 친일파의 행각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우리를 질리게 하기도 한다. 허나 매국이 아니라 애국을 한 ‘가진 자’도 있었음을 기억하자. 친일청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애국을 위해 희생한 이들에 대한 예우와 추모로도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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