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현대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은 적지 않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이회영 일가(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이시영)나 백산 상회를 세운 안희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양반 출신 혁신 유림세력 등이 있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모범적인 사회 지도층의 사례로 소개할 만한 인물은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허나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 만한 ‘기업인’으로 선택지를 좁혀 소개하자면 유일한 박사(이하 유일한)와 견줄 만한 이가 없다. 유일한은 선견지명이 있던 아버지 유기연의 결정으로 당시 9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1905년에 미국 감리교에서 선발한 조선인 유학생의 자격으로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형제들도 러시아와 일본,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유일한은 1909년에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설립한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여, 낮에는 농장 일을 돕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자기 힘으로 생활하다가 미시건 대학교에 입학한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피탈하고 나서 조선인에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는데 유일한과 그의 형제들이 유학을 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줬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한은 대학 생활 중 학업에 충실했음은 물론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장학금을 받기도 했는데 혹자는 이를 두고 유일한이 소위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다 갖춘 인재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유일한은 자력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 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서 제너럴 일렉트릭에 취직한다(제너럴 일렉트릭은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회사로,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기업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는데 유일한이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엘리트 계층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일한은 1922년에 사표를 내고 미국 내 중국인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병조림 사업을 시작, 번창하여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한다.
 
  유일한은 1926년에 귀국, 경성부 종로2정목(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종로2가)에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러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비참한 현실을 본 일 때문이다. 당시 제약회사들은 광고를 통해 타사의 약품을 평가절하하거나 자사 약품의 효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장난으로 얼버무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효능과 사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 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이 일화는 유일한이 기업의 영리보다는 사람들의 건강과 사회질서를 더 우위에 둔 건강한 경영철학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유일한이 세운 유한양행은 철저히 법인세를 납부하여,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군사정권 시절 군부는 기업을 상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요구했는데 유일한은 이러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보복성 세무조사가 수차례 이어졌으나 탈세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며, 유한양행이 생산한 약품에 대해서도 관련 당국이 철저히 조사했으나 흠잡을 만한 요소가 없었다고 한다). 유일한은 1969년 노환으로 인해, 경영에서 손을 떼며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하게 되는데, 전문 경영인 제도를 시행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한다. 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올곧게 살았고, 기업 경영인으로도 모범을 보여준 유일한의 삶은 오늘날 정경유착으로 인해 ‘기업인’을 생각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우리에게 ‘진정한 기업인’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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