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은 한반도가 일제의 탄압에서 해방된 해이기도 하지만 인류에게는 씻지 못할 충격을 안긴 최악의 참사가 벌어진 해로 기록되었다. 미국의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은 13만 5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리틀 보이’로 명명된 원자 폭탄은 이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빅 몬스터’였다. 넓은 섬이라는 뜻을 가진 히로시마(廣島)는 인간의 사체와 파괴된 건물의 잔해로 뒤덮였다. 인간의 생명에는 귀천(貴賤)도 없고 경중(輕重)도 없지만 원폭으로 인한 조선인 사망자의 수가 2만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한국과 일본의 어두웠던 과거를 대변하고 있다.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원폭 돔(原爆ド―ム:Genbaku Dome)에 2016년 5월 27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방문하여 헌화하였다. 그는 비록 공식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71년 전 구름 없이 맑은 아침에 하늘에서 죽음이 떨어졌고 세계는 뒤바뀌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도 인류가 핵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오바마 대통령의 다분히 서정적인 표현과 맞물려 이상한 괴리감을 머릿속에 만들어 냈다. 눈이 이례적으로 많이 와서 일본의 대학 입학시험 시간까지 연기했던 올 1월 중순에 긴장된 마음으로 히로시마에 왔다.
 
  전차가 다니는 도시는 왠지 낭만적으로 보인다. 더욱이 유럽의 도시가 아닌 아시아의 도시에서 전차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낭만적인 모습을 뛰어넘어 근대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질퍽한 비포장도로에서 소달구지나 끌던 낙후된 광경을 벗어던지고 전차로 대변되는 근대성을 도입한 일본의 모습이 이 도시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이제는 근대성이라기보다는 고전에 가까워 보이는 히로시마 전차 히로덴(廣電:Hiroden)은 드라마 세트장에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도시의 곳곳을 연결한다. 일본에서 11번째로 인구가 많다는 히로시마에서 아직도 전차를 운용하는 것은 이동수단 이상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창조된 새로운 가치에 감성이 입혀지면 우리는 그것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보존하려 드는 것일까. 히로덴을 타고 일본 3대 절경이라는 미야지마(宮島)의 선착장까지 이동했다. 왜 나는 일본을 갈 때마다 일본을 좋아하게 되는지. 아픈 역사만 머릿속에서 지울 수 있다면 일본은 참 괜찮은 나라다. 볼거리, 먹을거리, 살 거리가 득실거리는 히로시마에서 아픈 원폭의 트라우마만 지울 수 있다면 히로시마 역시 일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관광도시가 될 것 같다. 히로시마는 미야지마를 지척에 가짐으로써 더 빛을 낸다.

  페리를 타고 미야지마로 건너오니 어디서 내려왔는지 모를 사슴 가족들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눈이 내리는 설경(雪景)으로도 일본 3대 절경인데, 이 섬 전체가 3월 말부터 개화하여 4월 중순에 만개(滿開)하는 벚꽃으로 장식될 때 다시 일본 3대 ‘벚꽃 절경’이 된다고 하니 이 도시에서 폭발했던 ‘작은 소년’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여행하는 내내 마음을 괴롭혔다. 하지만 매년 만개하여 히로시마를 뒤덮는 벚꽃 잎은 영원한 평화에의 갈망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지 못한 여러 가지 일로 예년보다 훨씬 더 바쁜 2017년 벚꽃 철에 다시 시간을 내어 히로시마에 가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