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의 근대교육에 관한 연구는 흔히 서울의 배재학당과 경신학당으로 대표되는 교육과 평양에서 펼쳐진 숭실학당에서의 교육으로 나뉜다. 1885년 조선에 들어온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는 복음전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자, 곧바로 서울에서 교육사역을 시작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1885년 11월 고종황제로부터 학교설립 허가를 얻어 두 명의 학생으로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을 시작했고, 장로교의 언더우드는 이듬해 5월 자신의 사랑방에서 고아원 형태의 교육기관인 ‘구세학당’을 설립했다. 이 가운데 ‘구세학당’은 교육정책이 뚜렷하지 못해 교사(校舍)와 예산의 미비로 1897년 10월 폐쇄됐다. 평양에서는 서울보다 10여 년이 늦은 1897년 10월에 와서야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가 자신의 사랑방에서 ‘평양학당’을 시작했다. 이 학당은 1900년 숭실학당, 1906년 숭실대학으로 발전해 한국 최초의 근대대학이 되었다. 

  선교 초기 서울에서 기독교 교육이 실패한 것과 달리, 평양에서의 성공은 베어드 선교사의 확고한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그는 1897년 조선선교부의 교육고문으로 임명받자, 선교부의 기독교교육 정책인 “우리의 교육정책”을 수립했다. ‘토착적 기독교교육’을 내용으로 한 이 교육정책은 근대조선 최초로 초등교육부터 대학교육까지 총망라한 교육시스템을 창출했다. 또한 노동과 과학교육의 중시는 근대교육의 보급이라는 관점에서 서북지방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 특히 이 교육시스템의 정점에 있던 숭실은 베어드의 교육이념으로 일제강점기 수많은 민족지도자, 기독교지도자, 운동가를 배출했다.
 
  올해로 본교는 건학 120주년을 맞았다. 그러나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충돌하는 다원화, 다문화 사회 속에서 우리 대학이 기독교 건학이념을 구현하고,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많은 난관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난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고 만족할 수 있는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의 개발이 절실하다. 무엇보다도 베어드 선교사가 확고한 기독교 교육이념을 확립하여 교육한 것처럼, 오늘의 상황에 맞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독교 교육이념과 실천 방안의 수립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를 위해 우리 숭실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협력과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