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조선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조선인의 독립 의지와 저항심리가 쌓이고 쌓여 3.1 운동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자 무력만으로 조선을 통치하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불만을 잠재워보고자 ‘문화통치’ 정책을 펴게 된다. 이에 따라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형식상으로나마 보장되고, 무단통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고 일반 경찰제도가 도입되게 된다. 지방행정기관에 한해 조선인에게 참정권도 부여된다(이마저도 ‘25세 이상의 국세 5원 이상 낼 수 있는 성인 남성’에 한해서만 주어진 것이다. 소수 친일파 부유층에게나 주어진 권리일 뿐, 절대다수의 조선인은 누리지 못한 권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문화통치’는 결국 입에 발린 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뿐 실상은 우리 민족을 내부에서부터 분열시키기 위한 일제의 노림수이자 기만책이었다. 일제가 ‘무력’이 아니라 ‘문화’로 통치한다면 굳이 저항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논리로, 문화통치 기간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친일파가 된 사람의 수가 가장 많아진 기간이다. 수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가 저항의 길을 포기하고 친일노선으로 전향했다. 그러나 ‘문화통치’도 오래가진 못했다. 일제는 장기화된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고 패전이 거듭되며 패망의 기색이 짙어지기 시작하자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착취와 수탈에 열을 올리게 된다. 징용·징병에 이어 식량을 강제로 공출했고 심지어 학교나 사찰에서 사용하는 종(鐘), 일반 가정집에서 쓰는 놋그릇과 수저까지 강탈했다. 조선어 말살정책이 시행되어 조선어 교과목의 폐지와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주재년(1929년 1월 28일∼1945년 11월 14일)은 일제의 광기 어린 수탈과 억압을 보며 일제가 오래가지 못하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주재년은 1943년 9월 23일 24일경 나무를 하러 가던 도중에 율림리로 가는 돌담의 가운데 큰 바윗돌 앞쪽에 ‘朝鮮日本別國(조선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日本島鹿敗亡(일본 섬 놈들은 패망한다), 朝鮮萬歲(조선 만세), 朝鮮之光(조선이 빛난다)’라고 글자를 새겨, 일제를 비판한다. 바위에 새긴 글씨는 수일 만에 일제 경찰에게 발견된다. 일제는 바위 글씨의 내용이 조선인의 마음을 움직여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확대될까 두려워 글씨를 새긴 독립 운동가를 색출하는데 매달린다. 경비정 7, 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온 마을을 수색했지만, 글씨를 누가 새겼는지 밝혀내지 못하자 일제 경찰은 마을 주민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마을이 위기에 처하자 주재년은 글씨를 새긴 것이 자기라고 자수한다. 일제 경찰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관록 있는 성인 남성이 새겼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주재년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주재년은 여수 경찰서로 연행되어 4개월 동안 ‘너처럼 어린아이가 단독으로 범행했을 리가 없다’는 일제 경찰에 의해 배후세력을 대라는 강요와 함께 모진 고문을 당한다. 1944년 1월 21일 순천지청에서 열린 재판에서 일제는 주재년에게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을 적용,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언도한다. 판결 다음 날 주재년은 풀려났으나, 이미 고문으로 인해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석방된 지 한 달여 만에 주재년은 고문 후유증으로 만 15세의 나이로 서거한다. 주재년은 죽음을 맞기 전 ‘옷을 반듯이 입혀 달라. 나 죽은 뒤 좋은 세상이 온다.’라는 말을 남긴다. 주재년은 2006년 8월에 와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뒤늦게 밝혀진 어린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항일 투쟁 의지가 잊히지 않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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