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의 YMCA 강당에서 2.8 독립선언이 조선인 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다. 일제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경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되자 일제는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휩싸여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모진 탄압을 가한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연행되었으나 곧 풀려났는데, 풀려나자마자 위험을 무릅쓰고 2.8 독립선언서를 기모노에 감추고 이것을 입은 채로 조선에 반입시킨다(여성에 대한 몸수색이 상대적으로 어렵고, 또 일본 의상인 기모노에 조선 독립선언서를 숨겼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에서였다고는 하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에 뒤이어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미리 귀국해 황해도 지역 만세운동에도 관여했다가 체포, 구금된다. 이때 김마리아는 일제에 의해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평생 고통받게 된다. 김마리아의 회고에 따르면, 일제 경찰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찼다고 한다. 허나 김마리아는 “너희들 할 대로 해라. 그런들 나라 사랑하는 생명만은 빼앗지 못하리라.”라며 의연하게 대응했다고 한다. 수개월 동안 극악한 고문을 가하고 난 후, 이제 힘과 용기를 잃어 독립운동을 하진 못하리라는 판단에 일제는 김마리아를 석방한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석방 후 한 달 만에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만세 운동을 지속적으로 주도했고, 조선 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또다시 일제에 의해 체포된다. 당시 김마리아를 심문했던 일본 검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마리아는 여자로서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인격과 재질이 비범한 천재를 가졌음으로 그 대담한 태도와 거만한 모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 더욱 가증한 것은 오연히 ‘나는 일본의 연호는 모르는 사람’이라 하면서 서력 일천구백몇 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눈에 일본제국이라는 것은 없고 일본의 신민이 아닌 비국민적 태도를 가진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식민지 조선인에 대해서는 무시와 조롱을 전제로 하는 일본인 검사가 보기에도 김마리아가 대단히 비범한 인물이었으며, 확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기록이다. 해당 기록을 남긴 일본 검사는 시종일관 당당함을 유지하는 김마리아에게 탄복해 “너는 영웅이다. 너를 낳은 어머니는 더한 영웅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마리아는 1919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이 선고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이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황해도 대의원(여성으로서는 최초)이 된다. 1933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제약에 의해 경성부에 체류할 수 없었고 오직 신학만 가르칠 수 있을 뿐, 다른 일체의 교육이나 활동은 금지되었다. 김마리아는 이후 원산부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신학 교육에 힘썼는데, 1938년을 전후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해 많은 기독교인이 변절하던 시기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의 자존심과 기독교 신앙을 지켜낸다. 김마리아는 1944년 1년 후 있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평양에서 사망한다. 도산 안창호에게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조선이 독립되었을 것이다’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조선 독립에 큰 역할을 했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나 그 이름과 생애가 널리 알려지지는 못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우리가 아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꼽아보라고 했을 때, 더욱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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