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조약의 공식명칭. 조약 자체는 22일에 체결되었으나 일본 측이 발표를 미뤘다)이 체결되면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경술년(1910)에 나라와 민족이 치욕을 당했다고 하여 ‘경술국치’라는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하지만 일제와 당시 일본 국민에게 있어선 자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영토를 확보한 것이고, 많은 자원을 착취할 수 있는 식민지를 얻은 것이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전 세계에 선포된 ‘영광과 승리의 날’이었을 것이다. 허나 모든 일본인이 조선에 대한 강제병합을 지지했던 것만은 아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쓴 일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츠지(1880~1953), 성공한 변호사에게 보장된 평탄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후세 다츠지는 법대생 시절부터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했다고 하는데, 조선인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보며 일련의 불의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후세 다츠지가 쓴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제목의 글은 일본의 한반도 병합이 명백한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조선 독립운동의 정당함을 주장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조사까지 받게 된다. 빛나는 제국의 위업(일제의 입장에서)에 먹칠을 하려 드는 자국민(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은 일제 정부와 경찰을 분노하게 했을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협박과 회유가 있었을 법하지만 후세 다츠지는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후세 다츠지는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 유학생의 변호를 맡는 것으로 조선의 독립운동 지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는 법정에서 조선 침략의 부당함을 폭로했으며 내란죄 명목으로 잡혀 온 조선 유학생들에 대해 무죄를 주장한다. 1923년 9월 1일 진도 7.9의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인의 집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한다. 이때 후세 다츠지는 ‘자유법조단’을 창립하여 조선인 학살에 일본 정부와 군, 경찰이 가담한 사실에 대해 고발하고 책임을 물었을 뿐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책한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조선 신문사로 보내기까지 한다.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로 인해 조선 농민들이 조선총독부에 토지를 빼앗길 때는 조선 농민들을 돕기 위해 조선에 방문하여 사태를 파악한 후, ‘일제 식민지 정책의 약자에 대한 압박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감을 말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식민지 농업정책의 부당함을 알리려 애썼다. 후세 다츠지는 일련의 행적으로 인해 일제 당국으로부터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혀 변호사 자격을 박탈, 말소당했고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후세 다츠지는 조선의 광복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 재일조선인의 인권신장(선거권 부여 운동)을 위해서 활동했고 조선의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조선건국헌법초안>(1946)의 공동 집필에도 참여한다. 후세 다츠지가 조선의 독립에 기여한 활동은 너무나도 많아, 본 칼럼의 짧은 지면에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후세 다츠지는 1953년 만 72세의 나이로 타계했는데 생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조선인이 찾아와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신념으로 평생 조선 독립을 위해 헌신한 후세 다츠지는 2004년 (일본인으로는 최초이며 현재까지 유일하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조선 독립에 큰 도움을 준 위인인데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소개하는 교과서와 콘텐츠가 적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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