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광복 이후를 지켜본 벽안의 외국인 중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말을 남긴 호머 베잘렐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1949년 8월 5일)는 사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된 인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성당은 영국 왕실의 대관식과 결혼식, 장례식 등 중요 행사가 거행되는 곳이자, 영미권에서 누구나 납득할 만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어야만 묻힐 수 있는 곳인데, 그 웨스터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에 묻히길 원한다는 발언을 보면 헐버트가 한국에 대해 품었던 애정이 대단히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 큰 의미를 남긴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 주 출신의 선교사였는데, 조선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에 응해 조선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헐버트는 외국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과 함께 외국에 조선 홍보 활동을 병행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을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받는 아리랑은 이때까지도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는데 아리랑이 최초로 악보로 기록된 것(1896년)도 헐버트의 덕분이다. 헐버트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한글 발전에 이바지한 근대 국문학자 중 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한힌샘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 방법에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고, 고종에게 청하여 국문연구소가 설립될 수 있게 했다. (국문(한글) 연구와는 별개로, 세계 지리서를 한글로 간략히 옮겨 1889년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사민필지士民必知>는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이다.)

  헐버트의 업적은 문화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제의 압박으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로워지자 헐버트는 조선의 정치, 외교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헐버트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외교 자문의 역할을 맡았는데,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린다. 고종은 이에 맞서 1906년 헐버트를 특별위원에 임명해 외교 업무에 대한 전권을 부여,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허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1907년 7월 20일자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되면서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된다. 고종의 밀명을 받아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친서를 서방의 국가 원수들에게 전달하려 했다는 것과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준비를 한 일 등으로 인해 헐버트는 일제에게 미운털이 박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버리지 않았고 미국 내 조선 독립 운동가들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헐버트는 광복 이후, 광복절을 앞둔 1949년 7월 29일에 국빈의 자격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한국에 입국한 지 일주일 만에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별세했다. 한국에 묻히길 원한다는 고인 생전의 뜻을 따라 고인의 시신은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헐버트는 사후 1950년 외국인 대상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았고, 2014년 한글날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헐버트는 어니스트 베델(건국훈장 수훈자),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건국훈장 수훈자)와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 힘쓴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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