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베이징’이란 도시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베이징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기는 어렵겠지만 6년 동안 중국의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 있으면서 베이징에서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여러분들이 베이징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먼저 베이징에 있으면서 기억에 남았던 네 가지를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해요.
 
  베이징에서 첫 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시커짠(西客站)’이에요. 베이징에는 큰 기차역이 4개가 있습니다. 마치 서울의 서울역, 용산역 등과 같은 베이징의 주요한 기차역이죠. 그중 규모가 가장 큰 역이 시커짠이에요. 제가 고고학을 공부하다 보니 지방에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역을 자주 이용했어요. 이 역에서 새치기를 하는 중국인을 굉장히 많이 보았어요. 이 역에는 새치기를 하지 않으면 기차에 타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아요. 이를 보며 새치기는 좋지 않은 행동이지만 중국인이 새치기를 일삼는 것에 대해 아주 조금은 이해했답니다.
 
  두 번째는 ‘노구교(蘆溝橋)’예요. 이 다리는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손꼽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아름다워요. 길이 266m와 너비 9m의 이 다리는 281개의 돌난간으로 장식되어 있어요. 그리고 1937년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한 곳이기도 합니다. 베이징의 서남쪽에 위치한 이 다리 주변에는 철로가 있습니다. 기차가 철로에 진입하고 아름다운 노구교가 보이면 베이징에 도착했음을 알았어요. 그리고 노구교를 바라보며 포근함을 느끼곤 했죠. 이 다리는 저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문’과 같답니다. 
 
  세 번째는 자전거예요. 베이징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저도 베이징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4대째 물려받은 자전거를 6년 동안 타고 다녔죠. 베이징은 면적이 넓다보니 어떤 장소를 걸어가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래서 사람들은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해요. 중국에서 전염병 ‘싸스’가 유행했을 때조차도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전역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네 번째는 황사예요. 봄에는 황사가 심해져서 늘 미세먼지와 함께해야 했습니다. 바깥에 나가면 마치 하늘에 노란 셀로판지를 깔아놓은 듯한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무척 신기한 나머지 무작정 바깥을 돌아다녔죠. 결국 베이징에 와 한 달은 병원 신세를 지내야만 했습니다. 학기 동안 써야 할 학비의 3분의 1가량을 병원비에 썼던 기억이 나네요.
 
 
  베이징의 지리적 환경과 기후
 
  다음으로 베이징의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게요. 많은 이들이 베이징을 ‘북경만’이라고 이야기해요.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베이징이 항구 도시인가?’라며 의아했어요. 그런데 베이징을 북경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바로 베이징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평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남쪽을 제외하고 베이징의 모든 부분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마치 바다의 ‘만’처럼 보여서 북경만으로 불리는 것이죠. 베이징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가진 정치적 중심지였지만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수도로 적합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베이징 시내 자체는 대단히 평탄한 지역이기 때문에 이동이 편리해서 중국의 역사 속에서 매우 주요한 도시였죠.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일대를 돌아다니면 언덕이 거의 없어서 무척 편하게 다닐 수 있어요.
 
  베이징의 기온은 서울과 크게 차이가 없어요. 베이징의 연평균 기온은 대략 10~12℃ 사이예요. 서울의 경우 11.1℃로 베이징과 비슷한 기온이죠. 반면 서울과 강수량에서 크게 차이를 보여요. 베이징의 연평균 강수량은 480mm로 서울의 연평균 강수량의 반도 되지 않죠. 그런데 신기한 점은 베이징에서 1년 동안 내리는 80% 비가 여름에 내려요. 그래서 여름이 되면 베이징 곳곳이 물에 잠기곤 하죠. 이는 비가 여름에 집중되는 탓도 있지만 배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탓이 커요.
 
 
  
  수도 베이징의 역사
 
  이번에는 수도로서의 베이징의 역사를 한번 살펴볼게요. 중국의 역사 속에서 다섯 개의 국가가 베이징을 수도로 두었어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한족이 세운 명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이 도시를 수도로 세웠죠. 그 5개의 나라 중 요, 금, 원, 청은 모두 북방민족이 세운 국가입니다. 이 나라들은 그 주변의 농경지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죠. 또한 베이징을 살펴보면 북방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가 있고, 북방의 넓은 초원지대에 인접해 있는 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생활 무대로 하는 북방 민족들이 남쪽의 평원을 지배하기 위해서 베이징을 수도로 둔 것이에요. 항상 이 도시는 중국의 북방 민족들에게는 이렇게 전략적으로 이용돼왔어요.
 
  그런데 베이징을 수도로 둔 국가 중 특별한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명나라의 경우입니다. 명나라는 다른 국가와 달리 남쪽 세력을 쥐고 있었던 한족이 세운 국가입니다. 그래서 명나라는 당연히 남쪽에 있는 남경을 수도로 두었죠. 그런데 영락제가 집권하자마자 수도를 북쪽의 베이징으로 옮겼어요. 그 이유는 영락제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황제이기 때문이에요. 원래 영락제는 북방의 방어를 책임지던 사령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군사적 거점이었던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이는 남쪽 세력을 쥐고 있었던 한족의 정서에는 맞지 않은, 정치적인 판단에 의한 천도였다고 볼 수 있어요.
 
  이후 1949년도에 중화인민공화국도 베이징을 수도로 두었어요.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베이징이란 도시를 수도로 둔 것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중의 하나에요. 수도라는 것은 정치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하지만 중국 역사를 따져보면 대체적으로 경제적 중심지로서 수도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현재 중국 경제의 중심지는 상해입니다. 또한 남경은 상해에 매우 근접해있죠. 그래서 통상적으로 수도를 정한다면 남경이나 상해를 선택하는 것이 맞지만 어째서 베이징을 수도로 선택했을까요. 베이징은 북방 민족들의 주요 생활권이자 거점 도시라는 사실이 이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네요. 이 수수께끼의 답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한번 그 답을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베이징
 
  베이징을 이야기할 때 후퉁(胡同)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후퉁은 베이징의 옛 성내를 중심으로 흩어진 좁은 골목길을 말해요. 단순히 평범한 골목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곳에선 여러 가지를 찾을 수 있답니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들이 변형되었지만 여전히 본모습을 유지하는 것들도 있어요. 후퉁을 들여다보면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후퉁을 통해 우리는 중국의 공산당 혁명도 볼 수 있고, 오래전 베이징 사람들의 삶도 엿볼 수 있으며, 현대 사회가 변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후퉁뿐만이 아닙니다. 베이징의 모든 곳에 역사의 흔적이 있다는 거예요.
 
  베이징에 있으면서 느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모든 것에는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베이징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베이징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안에서 더 많은 것을 포착해내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답니다. 베이징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사라졌지만, 아직 남겨진 것들에서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청년들이 중국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아쉬워요. 중국인들은 더럽다, 중국의 문화는 미개하다고 치부하지만 이는 매우 편협한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방송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중국을 들여다보지만 그 모습이 다가 아니에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거두고 다른 시각에서 중국을 새롭게 마주하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베이징에 가서 보다 넓은 세상을 보고, 중국의 역사를 몸소 체험한다면 분명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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