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문학의 꽃’이라고 불린다. 시는 다른 문학 장르들과 달리 가장 문학적으로 언어를 압축하고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본교는 120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여러 문학 분야에서 활동한 수만 명의 동문을 배출했다. 수많은 동문들 중에서 문학의 꽃을 피워낸 시인들이 있다. 그 동문들의 시를 만나보고, 음절과 어절 하나하나에 담긴 정제된 아름다움을 느껴보면 어떨까.

 
 
 
 
 
김소형
 
 
그건 아주 낡은 벽이었지
하얀 점이 그려진
그런 벽
너는 비밀을 적고
나는 하얗게 덧칠하는 
그런 벽 
점은 더욱 커졌지 
거대해진 점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오른 하얀 점 
마치 시간의 물집 같았지 
 
밤. 
나는 힘껏 벽의 물집을 뜯었어 
안은 텅 빈 통로이더군 
천장엔 거꾸로 매달린 실타래가 가득, 
내가 톡 하고 건드리자 
실타래가 쩍 벌어졌어
그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지는 거 있지 
 
그들은 딱딱하게 굳어
녹색 돌이 되고 
붉은 돌이 되고 
검은 돌이 되어 
차곡차곡 쌓였어 
그만, 나는 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셈이야 
 
내 비밀을 말해줄까 
사실 내 팔뚝에는 하얀 점이 있어 
점은 더욱 커져 물집처럼 부풀었지 
말랑말랑한 부분을 잡고 
껍질의 경계선을 뜯어내면 
살이 뜯겨져 팔뚝 안이 보여 
그 속에는 죽음도 핏줄도 
우울의 뼈도 없어 
마네킹처럼 텅 빈 팔둑, 
쩍쩍 갈라진 그 속에는  
아주 작은 팔이 자라고 있거든 
그만, 나는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백한 셈이야 
 
  감상평
 
  박예진(정보사회·15)
 
  내게도 하얀 점이 있다. 아마도 가슴쯤에. 그쯤에 오른손으로 비밀을 적고 왼손으로는 그 위를 하얗게 칠해 버린다. 비밀은 은밀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그냥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이 된다. 슬프고 화가 나는 마음들은 물론 문득 떠오르는 생각도 비밀이 될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의 생각들을 비밀로 남겨두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들춰볼 수 없도록 하얗게 덮어 버린다.
 
  이 시를 읽고 화자를 공감했다. 그리고 이내 나 자신을 떠올렸다. 하얀색으로 덧칠한 내 가슴은 울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덧나지 않을까. 내 가슴의 하얀 점은 물집이 되었다. 물집을 뜯어내면 흉터가 될까, 아물게 될까. 이 시는 나에게 온갖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정진정(경제·16)
 
  이 시를 읽으며 서정적이면서도 개인적으로 잔혹하다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화자가 처음 본 벽의 하얀 점을 통해 벽에 대해 깨닫듯이 화자는 자신의 팔뚝에 하얀 점을 통해 자신을 다시 되새겼다. 여기서 말하는 아주 작은 나의 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문득 이는 신체부분이 아닌 나 자신을 구성하는 나의 생각, 사상 혹은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를 통해 내가 만들어진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김소형 시인: 1984년에 서울에서 출생해 본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작가세계』의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ㅅㅜㅍ』이 있다. 현재 동인으로 ‘작란(作亂)’에서 활동 중이다. 
 
 
얼룩의 탄생
 
김선재
 
 
지평의 먼 선 위를 아슬아슬 걸을 땐 얼룩이 돼야지 눈을 가리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부분에서 전체로, 그 전체의 한 모서리로
 
목 짧은 새들의 능선을 따라 소리가 번지고 얼어붙은 물들이 한 몸을 허물 때
 
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출처가 된다
 
그건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야 바라는 건 오직 바람, 바람이 내 말들을 허공에 풀어놓았지 둘레 없는 우리 속에 방종한 양과 말 들이 뛰어놀던 날, 내 말들은 갈기를 휘날리며 사방으로 달아나요 양들은 마음대로 구름과 한 몸으로 떠나가요 나는 아직 어떤 말로도 너를 부를 수 없는데 날아간 말들이 멀리 사라져요 말도 없이 양들이 구름 울타리를 넘어가요
 
숲을 주세요
내 말은 발밑을 기어가
일요일을 돌려주세요
내 잠은 솜털처럼 사소해
 
내리는 눈이 눈 속에서 심연을 터뜨리며 물방울이 될 때
해변을 거슬러 온 구름이 네 얼굴에 슬픈 곡선을 그릴 때
너는 아름답게 태어나 나는 아름답게 죽는다
누군가 발등에 흘리고 간 눈물 같은 얼룩이 돼야지
눈에서 눈으로 전해진 풍경이 소식이 되는 날
 
두 번 다시 더해지지 않을
얼룩이 될 거야
 
 
  감상평
 
  양혜림(문예창작·17)
 
  나는 한 번도 얼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얼룩의 탄생’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얼룩을 시의 소재로 다룬다는 것이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시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첫 연이었다. ‘지평의 먼 선 위를 걸을 때는 얼룩이 돼야지’라는 구절에서 지평의 먼 선 위를 걷는다는 것은 삶에서 위태롭고 힘든 시기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시기에 얼룩이 되겠다고 말하는 시인의 언어 속 얼룩은 단단하고 강인했다. 어디에든 스며들어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말이 나에게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백하은(문예창작·17)
 
  시를 읽는 동안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의 부재하던 언어의 형상을 발견했다. 시에서 그려지는 섬세하고 평화로운 공간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한다. 말들이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오고갔다. 우리가 내뱉는 말들은 형상이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 말들이 이 공간 속에서는 ‘흔적’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타인에게 준 말들은 어떤 얼룩으로 남아있을까. 나는 타인에게 지워지지 않는, 하지만 두 번 다시 더해지지 않을 얼룩 같은 것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누군가의 얼룩이고 오늘도 얼룩이 되기 위해 말을 내뱉고 있는 건 아닐까? 
 
  김선재 시인: 1971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해 본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실천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2007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얼룩의 탄생』, 소설집 『그녀가 보인다』, 장편소설 『내 이름은 술래』를 펴냈다.
 
 
 
발자국을 밟는다
 
김경자
 
신발 뒤축
바닥 바깥 쪽이 닳아져 있는 그는
약속 시간 5분 전에 먼저 들어섰을 것이다
좋은 일에 제 자리를 내어주고는
한 번쯤 뒤돌아섰을까
생일이 되면 발을 모으고
촛불 하나 더 울려 세웠을 것이다
 
일어서서
앞서간 이의 발자국을 밟는다
그의 보폭이 커서
한 걸음에 미치지 못하고
두 걸음에는 빗나간다
그래도 어긋나며 따라 밟아간다
가다보면 보폭은 자라서
N과 S같이 꼭 당길 것이다
오른발 왼발 척척 맞출 것이다
 
겹겹이 포개어진 발자국들을 본다
 
 
  감상평
 
  전우연(융합자전·17)
 
  시를 읽으며 고달프고 지친 화자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을 밟는다는 것은 빗나가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는 벅찬 일이지만 이내 곧 익숙해지고 결국에는 자연스러워 진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발자국을 밟는다는 것은 태초부터 발자국을 남긴다는 것과 원래 존재했던 발자국을 따라가는 두 개의 의미가 있다. 전혀 반대되지만 모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는 일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간단한 내용임에도 이 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신발 뒤축’과 ‘일어서서’의 4음절과 비슷한 구조의 행들이 시를 읽을 때 재미를 주기도 한다.
 
고진희(문예창작·17)
 
  ‘발자국을 밟는다’를 읽고 많은 이들이 연인과 생일을 보내고, 산책을 하고 보폭을 맞추며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아버지와의 추억이 생각났다. 2연의 ‘앞서간 이의 발자국을 밟는다, 그의 보폭이 커서’ 이 부분을 읽으며 보폭이 나보다 커서 한눈을 팔면 금방 멀어졌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보며 천천히 보폭을 맞춰주시는 아버지의 따스함을 떠올렸다. 이처럼 시인의 의도와 다르게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개개인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이 시의 매력인 것 같다.
 
  또한 이 시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 시대에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것 같다. 보폭에서 차이가 나지만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따라 밟아가는 모습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강에스더(사회복지·17)
 
  어떤 따뜻함들은 뜻밖의 순간에 발견된다. 예컨대 어긋난 채로 앞뒤로 이어지는 발자국처럼. 저마다 보폭과 발걸음 소리가 다르지만 ‘겹겹이 포개어진 발자국들’은 다정하게 계속된다. 할머니의 소매 끝을 잡고 할머니 뒤에서 할머니 발걸음을 따라 걷는 할아버지를 본 기억이 있다. 손을 잡고 왼발, 오른발을 같이 내딛는 연인을 본 기억이 있다. 빠르게 걷다가 멈추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주던 사람들이 있다. 내 걷는 속도에 맞추어 느리게 걸어주던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따스한 발걸음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김경자 시인: 1943년에 원주에서 출생해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했다. 제32회 계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됐고 현재 지송문학회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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