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통을 알 때 빛나는 인간을 위한 정치
세상의 고통을 알 때 빛나는 인간을 위한 정치
  • 조연우 수습기자
  • 승인 2017.05.29 20:45
  • 호수 11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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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5일(목),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김민웅 교수는 ‘인간을 위한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껴안고 그 사람들을 호명할 때, 정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답했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보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깊은 오해일지도 몰라요.”

  지난 24일 수요일에 JTBC ‘손석희의 뉴스룸’의 앵커 멘트를 들으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손석희 씨는 무모한 도전에 대해 이야기하며 돈키호테를 ‘광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돈키호테가 풍차를 자신을 공격하는 거인으로 착각하고 풍차를 향해 돌진한 에피소드를 언급했죠. 저는 개인적으로 아쉬웠어요. 손석희 씨가 돈키호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거든요.

  돈키호테는 소설 속 주변 인물들에게 ‘괴짜 노인네’, 혹은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던 인물이에요. 그래서 대중들에게 돈키호테는 단지 엉뚱한 일을 벌이는 우스운 주인공으로 인식됐죠. 그러나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이 돈키호테를 미쳤다고 했던 이유는 그가 지나치게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에요.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발명한 이후에 유럽에선 쉽게 책을 접할 수 있었으나, 그 이전에는 사제나 승려 등 특정한 직종의 종사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책을 많이 읽는 돈키호테는 독특한 인물로 여겨졌고요.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는 책 속에만 파묻혀 사는 사람, 현실을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실천하는 참된 지식인으로 평가되어야 해요. 대부분의 지식인은 말만 하고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자신이 책을 통해 배운 가치를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었어요. 예를 들어 소설 속에서 돈키호테는 저 멀리서 호송되어 온 죄수들을 발견하고 호송자들에게 “죄수들을 풀어 달라”며 “성경에 말씀이 있다”라고 말하며 풀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 당시 중세 사회에서 죄수들은 극악무도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라기보다 사회 체제에 항거하거나 가난해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죠. 그는 호송자들과 싸우며 온몸이 부서졌지만 죄수들을 풀어줍니다. 이처럼 돈키호테는 자신이 읽고 배운 대로,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이런 맥락에서 돈키호테를 이해하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돈키호테와 같은 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죄수를 보면 그 죄수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돈키호테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고 죄수들을 풀어주기 위해 호송자들에게 돌진해요. 돈키호테는 그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죄수가 되는지, 누가 그런 억울한 일들을 겪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죠. 즉, 돈키호테는 그 시대의 한계에 정면으로 부딪친 사람이에요. 중세의 관습, 종교, 사고, 상식에 대항하며 자신이 희생당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요. 돈키호테가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어요.

  돈키호테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어요. 우리는 그 오해에 익숙해져서 평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 쉽게 속을 수 있죠. 언론이나 방송이 프레임을 만들어 내면 그 프레임에 갇혀 올바른 판단이 힘들어지는 것처럼 말이이에요. 즉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과거와 현재에 매몰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오해에 대해 자각하면, 역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시작해요.”

  1492년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세계관을 정립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1492년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며 유럽의 역사를 새롭게 쓴 해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서구는 굉장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그러나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새로운 발견’, ‘새 역사의 시작’으로만 본다면 유럽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역사는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돼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갑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것은 금광과 은광이었어요. 특히 당시에는 은광이 굉장히 가치 있었죠. 중국이 은 본위 화폐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은이 필요했거든요. 이 때문에 유럽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유럽에 있던 질병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에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의 90%가 목숨을 잃어요. 급격하게 노동력이 부족해졌고 은광을 채취하기 힘들어지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동자들을 억지로 끌고 오게 됩니다.

  인디언 이야기도 해봅시다. 미국에는 ‘콜롬버스 데이(Columbus Day)’라는 것이 있어요. 콜롬버스가 처음 미국을 발견하고 미국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그런데 콜롬버스 데이가 되면, 매해 시위가 일어나요. 미국의 원주민들,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주도하에 말이죠. 모두가 알고 계시겠지만 인도 사람도 아닌 그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당시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인디언이라는 명칭조차 철저하게 유럽중심주의적인 관점이죠. 또한 1766년에 있었던 미국의 독립전쟁은 통상적으로 최초의 식민지 해방전쟁이라고 불려요. 그러나 식민지 해방전쟁이었다면 아메리카 대륙의 원래 주인인 원주민이 해방되어야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죠. 이는 식민지 해방전쟁이 아니라 단순히 유럽의 체제가 확대됐다고 봐야 합니다. 주도권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지, 원주민들이 가진 게 아닌 것이죠.

  역사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유럽의 자본주의는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가 이어져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자본은 노예예요. 유럽의 자본주의 내부에는 폭력이 내장되어 있다는 거죠. 이 폭력적인 시스템이 1492년을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1492년은 서구가 비서구를 노예화하여 착취하는 체제가 시작된 해입니다. 서구가 얻어낸 부유한 삶의 기저에는 비서구 원주민들의 희생이 깔려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해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의 악몽일지도 몰라요.”

  1960년대의 일입니다.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워싱턴 광장에서 연설을 했죠.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제목의 연설입니다. 킹 목사가 가지고 있던 꿈은 같은 식탁 위에서 백인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같이 먹고 마시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양과 사자가 함께 어울릴 것’이라는 표현을 변주한 문장이었죠. 당시 미국은 아메리칸 드림을 내세웠어요. 미국은 기회의 땅이며, 출신 성분과 상관없이 뭐든 가질 수 있다는 꿈이었죠. 킹 목사는 ‘그 꿈에서 왜 우리는 제외되어야 하는가’라고 질문해요. 그들의 식탁에 흑인들도 참여시켜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킹 목사와 동시대에 살았던 또 다른 흑인 인권 운동가가 있습니다. 바로 말콤 엑스인데, 그는 ‘Your dream is my nightmare’라고 말해요. 너의 꿈은 나의 악몽이라는 거죠. 네가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은 애초에 흑인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중에 출애굽기에서 아주 유명한 장면이 있어요. 모세가 나일강에 지팡이를 담그자 강이 핏물로 변하고, 그래서 이집트인들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되는 장면이에요.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나일강이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부의 원천을 상징하기 때문이에요. 이집트인은 히브리인을 노예로 부리는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히브리인을 나일강에 던져 죽여 왔어요. 그리고 그 던져진 히브리인들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모세죠. 모세가 나일강에 지팡이를 담그자, 그동안 이집트인들이 착취해 온 히브리인 노예들의 피가 떠오른 거예요. 이집트가 이룩한 부를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의 기적이라고 불러 왔어요. 그러나 그 기적은 노예들의 고통, 아우성, 절규, 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엑스의 말과 다르지 않아요.

 

  “모든 정치의 출발점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껴안고 호명하는 일이에요.”

  길게 역사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이렇게 역사를 다시 보는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 궁금해 하실 것 같아요. 제 강연 제목은 ‘인간을 위한 정치’였어요. 인간을 위한 정치란 우리 사회에서 누가 피를 흘리고 있는지, 누가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국민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그를 좋게 평가하는 이유는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모습 때문일 거예요. 정말 고통받는 사람들을 껴안고, 그 사람들이 누군지 하나씩 호명하고, 앞으로는 누구도 희생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모든 정치는 여기서 시작할 때 빛나요.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목격하고 있어요. 세월호가 3년 만에 인양되고 여러 진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했죠. 이 변화는 세월호의 아픔을 견딜 수 없어 끝까지 버틴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에요. 아파하는 사람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세상에 여러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시작이에요. 인문학은 스스로 위로를 건네는 학문이 아니에요. 바로 고통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는 학문이죠. 들리지 않는 절규를 듣는 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고통을 보는 힘, 아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는 일. 그런 사람, 그런 교류, 그런 자세, 그리고 그런 정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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