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일장로신학대총장 현 동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영호(법학58) 동문을 만나



그의 머리에 내린 하얀 눈은 올바르게 제자를 키워내고자 했던 교육자의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다. 무뚝뚝하지만, 소담한 반찬그릇을 자꾸만 건네는 모습은 어쩐지 자상한 할아버지 같기도 했다. 그 이면엔 한일장로신학대학(이하 한일장신대) 총장 임기를 마친 후, 영화인생으로 내달음질한 큰 열정이 숨어 있었다. 아담한 양옥집 지하층 한가득 영화 비디오며 DVD며 잡지들을 수북히 쌓아놓아 영화광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영호 동문이 말하는 교육과 영화, 그리고 숭실대의 추억을 여기 꺼내본다.

 



한일장신대의 교수와 총장까지 지난 36년 간 후학 양성에 힘쓰셨습니다. 교육철학은 무엇인지요?

익산에서 전도사로 1년 반을 지낸 후 결핵에 걸려 고향 군산으로 내려가야 했다. 당시 결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는데, 72년 당시 여자신학교였던 현재의 한일장신대에서 나를 불렀다. 몸이 안 좋아서 더 이상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고, 그저 교육에 모든 것을 다 쏟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삶의 뿌리이자 교육철학은 “인간은 인간답게”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학생 스스로 깨닫고, 배우고, 알게 하려고 했다. 친절하게 가르치진 않았다. 질문과 질의를 통해 학생들을 괴롭히면서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했다. 나 역시 교육현장에서 그처럼 되려고 노력했다. 내 제자가 여성운동가가 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것이 어쩌면 그 열매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떻게 보십니까?


내가 총장으로 있을 때부터 대학에 새로운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학의 시장경제화, 산학협동, 재정확충집중, 취업률 등이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가치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도 필요한 가치이지만 너무 한쪽으로 쏠려있는 것 같다.


소위 장사 잘되는 학부에 치중하니 기초학문이 설 곳을 잃는다. 기초는 부실하게 해놓고 표면적 가치를 좇고 있는 셈이다. 실용주의도 밑바탕이 되는 성숙한 가치가 없으면 허울만 좋을 뿐이다. 고전 대학의 의미와 힘을 잃어서는 안 된다.



동학기념사업회 이사장이십니다.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동학은 농민이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그릇된 관습 철폐, 정부 비판, 계급타파, 남녀차별철폐 등은 굉장히 진보적인 생각들이었고, 그들이 주장한 것은 인간화의 회복이었다.


현재 사업회에서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전북 내에 있는 동학 유적지, 역사 탐방을 하고 있다. 백일장, 세미나, 찾아가는 특강 등 다양한 기념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가장 가시적이면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올해 동학혁명사를 영어, 일어,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각 언어별 지역에 있는 대학들에 송부했다.



예술전용영화관 위원, 전주국제영화제 이사, 전북독립영화협회 위원장 등 영화와 관련된 많은 일을 하십니다.


영화는 세상에 대한 이해다. 영화에는 기쁨, 슬픔, 악과 선, 그리고 그것을 가진 다양한 인간이 뒤엉켜 있다. 영화는 세상사를 응축시켜 보여준다. 단면적인 사건으로 그 본질을 세상에 폭로하기도 한다.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접할 기회가 많았다. 간판 미술하시던 분을 알아 공짜로 영화를 보기도 했고, 나중엔 성남극장 같은 델 다니며 많이 봤다. 대학 후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교육자료를 구하면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영화사 100년이 되던 해인 1995년에 영화와 관련한 자료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접하면서 하나 둘 영화를 섭렵했다. ‘신학으로 보는 문학읽기’라고 다른 작가와 교대하며 격주로 1년 반 동안 영화평을 연재하기도 했다. 총장을 끝낸 후엔 소장하고 싶은 작품들을 직접 수집하다 보니 관련 업계 종사자들도 자연스레 알게 됐다. 총장으로 교육자 생활을 마감한 후 다시 영화에 열정을 쏟다보니 여러 직책을 맡게 된 것 같다.


이 동문의 학부생활이 궁금해집니다.


내가 학교 다녔을 때는 지금 베어드홀이라고 불리는 과학관과 기숙사 두 건물만 있었다. 학생 수도 적다 보니 모두 가족같이 지냈다. 양주동, 안병욱, 김현승 등 훌륭한 스승도 많았고, 그 분들 밑에서 배울 수 있어 참 좋았던 시절이었다.


문예활동을 많이 했는데, 교지 ‘숭대’에도 글이 몇 차례 실렸다. 졸업하는 해 단막극을 썼는데 그 때가 내 창작활동에 있어 가장 꽃을 피운 시기였지 싶다. 계속 시나리오도 썼지만 발표는 못했고.


직원중심의 연극동아리에서도 활동했고, 잠시였지만 관악단에서 클라리넷도 연주해봤다. 당시 신학에 관심이 많아 관련 서적이나 소설을 많이 읽었다. 종로 쪽에 고전음악감상실이 있어 하루 종일 차 한 잔 시켜놓고 책 한 권 다 읽었다.


또 문예창작학과에 재직 중인 이반교수가 마라톤을 참 잘했었다. 나는 마라톤이란 걸 그 때 처음 해봤다. 50명이 시작해서 15명이 남았는데, 뒤쪽에서 왔다갔다하며 정말 힘들게 뛰었다. 마지막 뛸 때의 짧은 그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몸은 힘든 데도 발은 자동적으로 뛰더라. 그 힘든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결승점을 통과했던 것만으로도 굉장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후배에게 한마디 하신다면요.


시대와 사회와 현실에 예민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 개인주의는 좋지만 이기주의는 지양해야 한다. 이기주의는 부패한 사회의 근원이다. 남을 위하지는 못하더라도 남을 배척해선 안 된다. 소외된 자들을 보려면 예민해야 한다. 이 시대와 사회를 생각하며 잠이 안오고 전전긍긍할 줄 아는 대학생이 되길 바란다.

 


 



이 동문은 ‘과거와 전통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전 속에 담긴 엄청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교수의 할 일이라고도 했다. 또한 그 가치를 찾아내려면 현대사회를 고민하는 진지한 자세를 가질 것을 주문했다.


따뜻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 속에 담긴 열린 마음이 돋보였다. 나이가 든 후에도 열린 마음과 자세를 갖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에 새삼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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