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의사(이하 강 의사)는 1855년 평안북도 덕천군의 농가에서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과 한방의술을 익혔고 1884년 함경남도로 이주해 한약방을 차리고 한의사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강 의사는 이동휘 선생과 교류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앞날이 위태로운 조선을 위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한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강 의사는 인생의 황혼기라 말해도 좋을 50대 중반이었으나, 가산을 정리해 가족과 함께 만주 북간도로 망명해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동참하게 된다. 강 의사는 길림성 요하현에 한인들을 모아 신흥동이라는 신한촌을 형성, 동광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한다. 신한촌은 훗날 러시아와 북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가 된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는 신흥동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연해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 요하현 지부장 역할을 맡는다. 강 의사는 피가 끓는 청년이 아니어도 독립에 대한 열망만 있다면 노인 또한 독립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강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노인동맹단 대표 자격으로 독립요구서를 제출하기도 했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 청원서 제출을 논의하기도 했다.

  3.1운동이라는 대사건으로 조선인의 분노를 경험한 일제가 ‘문화정치’라는 기만책을 시행하기 위해 사이토 마코토를 새로운 총독으로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된 강 의사는 신임 총독을 직접 처단하기로 결심, 러시아인으로부터 폭탄을 구입한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에서 무수한 환영 인파와 경비의 삼엄한 경계 가운데 열차에서 내려 마차에 오르려는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다. (당시 강우규 의사의 나이는 64세, 당시 조선인의 평균 수명이 남자 51.1세, 여자 53.7세였다고 하니, 환갑을 넘긴 강 의사의 의거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강 의사는 비록 총독 암살 자체는 실패했지만 일제의 고위 관리 외 37명을 사상시켰다. 의거 이후 현장에서 몸을 피하긴 했으나, 도피 15일 후인 9월 17일 가희동 하숙집에서 일제 고등계 형사인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강 의사는 취조와 재판과정 내내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형 선고가 내려지자 변호사를 선임해 항소하자고 적극 매달리는 아들의 말에도 죽음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았다. 강 의사는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언제든지 눈을 감으면 쾌활하고 용감히 살려는 전국 방방곡곡의 청년들이 눈앞에 선하다.”라고 말하며 조선 청년들이 억압받는 현실에 대해 자각할 수 있게 되길 소원했다. 강 의사는 자기가 폭탄을 던져 고위 관료를 아무리 많이 죽인들 그것만으로는 독립이 될 수 없지만, 혼란의 시대에 자신의 의거와 죽음(사형)으로 조선 청년들에게 ‘조그마한 충격’이 된다면 그 충격이 잔잔한 물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큰 파급을 가져올 것을 예견한 것이다. 형이 집행되기 전, 강 의사는 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남긴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개무감상(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걱정한 강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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