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아니다.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기하라 히토시 박사로,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보인 것은 육종학과 농업기술이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지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과일인 제주도 감귤도 우장춘 박사의 제안으로 재배가 시작된 것이고, 원예와 농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기후와 토양에 맞는 품종이 개발, 보급된 것도 우장춘 박사의 덕분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해결과제였던 시절 연구에서 얻은 진리를 바탕으로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가난한 나라를 회생시킬 수 있는 결과를 안겨준 우장춘 박사가 그 자신의 학문적 업적이나 성과 대신 ‘씨 없는 수박’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우장춘 박사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과 일본 여성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우범선은 을미사변 가담경력으로 인해 조선의 적으로 간주되어 1903년에 암살되었는데 우장춘 박사는 아버지의 부재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한때 고아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가정 형편이 나아진 후에는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해 중학교까지 마친 후,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의 지원으로 조선총독부가 학비를 지급,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진학을 지시받게 된다. 우장춘은 본래 공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했으나 농대에 가야만 학비를 지원해주는 방침 때문에 1916년 도쿄제국대학 실과 농학과에서 학업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장춘은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게 된다.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해 조선계 유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친일 연설을 하는데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던 김철수(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그 연설을 듣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단상에 뛰어올라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항의한다. 이제 막 대학 신입생이 된, 지금껏 조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던 우장춘에게 있어 그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이후 우장춘은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되는데,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그의 부친 우범선의 매국행위에 대해 속죄하고자 한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우장춘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우장춘은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최초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 타키이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해 연구에 진력하다가 1945년 종전 후 퇴사한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우장춘 박사 귀국 운동이 벌어지자 귀국한다. 이 때 일본 당국은 우장춘이라는 고급 인재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우장춘 본인의 강한 의지에 따라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다. 대한민국이 왜 우장춘의 귀국운동까지 벌일 정도로 그를 원했는가 하면, 당시 우리의 식량 사정이 처참한 수준이라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절실했고, 우장춘과 같은 농학 인재는 그야말로 보배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장춘은 귀국 이후 육종학과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총력을 다했다. 당시 열악했던 우리나라의 사정상 우장춘이 지원받을 수 있던 연구시설도 자금도 변변치못한 것이었지만 우장춘은 어려운 조건과 상황 가운데서도 연구개발에 매진하여 우리 농업의 발전과 농촌의 부흥에 크게 기여한다. 우장춘은 일련의 업적으로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거절하고 연구의 길만을 걸었다. 1959년 8월 10일 타계하기 전 그에게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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