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작은 섬나라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 같다. 일본 열도의 전체 크기는 한반도의 약 1.7배에 이르고, 한 여름에도 서늘함을 유지하는 홋카이도(北海道)의 크기는 대한민국의 3분의 2에 달한다. 일본을 작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막연한 역사적 우월감’이 그 기저(基底)에 있다고 본다. 역사에 대한 인식을 머릿속에서 조금 걷어내고 보면 일본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여행자 천국에 가깝다. 밤에도 안전한 치안, 친절한 사람들, 전국을 실핏줄같이 연결한 철도, 그리고 맛있는 음식. 특히 천편일률적으로 ‘맛의 효율’을 강조하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보다는 ‘그 지역의 그 식당’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맛집이 많아서 너무나도 좋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지난 7월 말 북국(北國)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러 홋카이도의 삿포로(札幌)로 피신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불어오는 삿포로의 시원한 바람이 뜨거운 바람으로 부풀어있던 콧속을 뻥 뚫어버린다. 나는 어려서부터 인간은 신선한 물과 깨끗한 공기만 있어도 성경에 나오는 므두셀라(Methuselah)만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곳 삿포로에서 갑자기 므두셀라까지 떠올리며 호들갑을 떠는 나. 그러나 므두셀라만큼의 생명을 하나님께 부여받았지만 스스로 공해를 만들어 자멸해가는 인간이라는 존재까지 생각하자니 단순한 호들갑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호텔의 세면대에는 ‘마실 수 있는 물’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는데 이 작은 안내문이 왜 이렇게 큰 부러움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삿포로의 먹을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라멘과 맥주를 알아준다. 어디서 먹어도 맛있는 라멘이지만 식당 앞에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는 집은 특히 맛있는 집이라고 보면 된다. 소문난 집에 먹을 것이 없다던 말은 삿포로에서는 쓸 수가 없다. 소문난 집이 소문나게 맛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소문난 집은 금세 가맹점이 생겨서 전국으로 퍼져나가지만 일본에서는 바로 이 순간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다. 난 이런 게 좋다. 김춘수 시인의 꽃과 같은 이곳만의 맛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식당.
 
  삿포로 맥주박물관은 1876년에 설립된 삿포로 맥주의 역사에 대해 전시하고 알리는 것 이외에 여러 종류의 맥주를 시음하고 맛을 품평하는 공간이다. 맥주라면 일가견이 있는 나는 1층에 있는 시음코너를 떠나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므두셀라에게는 좋은 공기와 물이 있었겠지만 맛있는 맥주는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니 인간의 수명이 줄어든 것이 그다지 억울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우스운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난 이미 삿포로 맥주의 맛에 취해버린 것이리라. 맥주의 맛을 즐기느라 야구장이 축구장으로 변신하는 트랜스포머 삿포로돔은 여행의 마지막 날에 가기로 했다. 맥주는 늘 내 여행일정을 방해하는 훼방꾼이다.
 
  스스키노 상점가, 시계탑, 오도리 공원, 구 청사 건물, 홋카이도 대학 캠퍼스 등 볼 것은 많지만 다 세세하게 둘러보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 다시 더위를 피해, 아니면 설국(雪國)의 정취를 감상하러 이 도시  삿포로에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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