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에서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에 비견할 만한 인물

  19세기말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인의 문명개화와 복음화를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헌신하였다. 서울에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배재학당’과 ‘경신학당’을 세웠고, 평양에서는 베어드가 ‘숭실학당’과 ‘숭실대학’을 세웠다. 서울이건, 평양이건 이들 교육기관들은 한국 근대교육의 모델이었으며, ‘숭실대학’은 일제강점기 조선선교부 교육시스템의 완결이었다.

  숭실 설립자 베어드는 1891년 내한하여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간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의 사역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1891-1896)는 부산과 대구에 선교지부를 설립하고, 한반도 남쪽의 선교를 담당한 시기이다. 둘째(1897-1915)는 조선선교부의 교육정책인 “우리의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평양에 숭실학당(1897)과 숭실대학(1906)을 세운 시기이다. 이 시기 그는 숭실에서 ‘토착적 기독교교육론’에 입각한 교회와 사회 지도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셋째(1916-1931)는 1916년 ‘대학문제’로 숭실 교장직에서 물러난 후, 1931년 사망할 때까지이다. 그는 이시기 주일학교 공과교재 번역 및 출판, 성경번역, 기독교 문서번역 등 문서선교사역에 전념하였다.
 
  베어드는 한국선교초기 복음전도, 기독교교육, 문서선교에 있어서 탁월한 개척자였다. 특히 기독교교육 분야에서는 그만큼 탁월한 업적과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교사도 드물었다. 그러기에 미국 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는 베어드를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에 비견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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