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식 명칭을 지켜 쓰는 이는 많지 않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하는 공식용어는 일본군 ‘위안부’이다. 범죄 주체인 일본군을 명시하고, 위안부로 불렸던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를 붙였다.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지정한 ‘세계 위안부 기림일’이다. 그 다음날인 8월 15일은 대한민국이 일본 치하로부터 벗어난 광복절이다. 8월 30일, 지나간 8월을 되돌아보며 역사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위안부’ 관련 장소들을 담았다.

 

  12시, 종로구 / 주한일본대사관 제1298차 수요시위

  “할머니에게 명예와 인권을!”

  종각역 2번 출구로 나와 십 여분을 걸으면 ‘평화로’에 위치한 주한일본대사관을 마주하게 된다. 매주 수요일 평화로에는 대사관 건너편의 소녀상을 중심으로 폴리스라인이 설치된다. 바로 이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리기 때문이다. 현재 수요시위는 지난 1992년 1월 8일 제1차 수요시위가 열린 이후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수요시위는 항상 ‘바위처럼’을 제창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 수요시위도 ‘바위처럼’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이날 수요시위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이번 시위가 이틀 전 노환으로 별세하신 하상숙 할머니의 추모 시위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故하상숙 할머니는 국제 법정에 참석해 피해를 증언하는 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시위에 참석한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 옆으로 故하상숙 할머니의 영정이 모셔졌다. 할머니들은 故하상숙 할머니를 추모하며 참석자들과 함께 묵념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참석자들을 향해 “한 번 아프고 나니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평화의 길이 열려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살아가도록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수요시위 참가자들은 매우 다채로웠다. 약 75명의 중·고등학생들은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중앙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으며, 폴리스라인의 바로 옆자리는 한·일 NCC URM 이주민 협의회와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교 학생들이 차지했다. 일본인들이 역사적 잘못을 인식하고 시위에 참여한 모습은 무척 인상 깊었다. 이 밖에 610일 동안 소녀상 옆을 지켜온 소녀상 농성 대학생 공동행동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날 자유 발언대에는 △부산대병원 정재범 지부장 △한·일 NCC URM 이주민 협의회 도이 케이코 씨 △리츠메이칸 대학교 이도 다카시 군 △소녀상농성단대학생공동행동 최혜련 대표 △전남고등학교 백남경 군이 순서대로 올랐다. 그 중에서도 일본인들의 발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도이 케이코씨는 한·일 NCC URM 이주민 협의회원들을 대표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며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발언 내내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하상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들의 성함을 어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호명했다. 그는 “일본 대사관을 바라보는 소녀상의 눈빛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며 “객관적인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어 리츠메이칸 대학교 소속 이도 다카시 군 역시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도 다카시입니다”라며 한국말로 운을 뗐다. 그는 “의무교육 과정에서 한 번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접한 적이 없다”며 정부와 일본 공교육을 비판했다. 
 
  시위가 마무리된 후 혼자 남은 소녀상의 발 근처는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의 흔적으로 가득 찼다. 꽃과 꽃신, 종이학과 같은 따뜻한 마음과 더불어 세월호 리본, 스텔라데이지호 리본도 놓였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처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잊지 말아야 할 것들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 2주 후 수요시위는 제1,300차를 맞게 된다. 지난 2003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집회’로 등재되어 매주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수요시위는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계속 슬픈 기록을 써나갈 것이다.
 
  3시, 마포구 /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내가 살아남은 게 꿈 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마포구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으로 들어서면 일본군 ‘위안부’를 그린 벽화가 쭉 이어진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지난 2012년 5월 5일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개관한 박물관이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이곳은 전 세계의 전시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매표소 앞에서 삼천 원을 내고 티켓을 구매했다. 티켓 뒷면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故강덕경 할머니와 인연을 맺었다. 박물관의 티켓 뒷면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사진과 일생이 적혀 있는데, 이는 할머니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다. 티켓을 손에 쥐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스피커에서 위안소 생활을 연상시키는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얼굴과 손을 본떠 만든 벽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면 故강덕경 할머니가 피해를 증언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지하실은 좁고, 천장이 낮고, 사방이 어두웠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세상도 이 지하실처럼 캄캄했을 것이다. 
 
  2층은 국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국가범죄로서의 ‘위안부’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있었던 운동사를 기록한 공간과 피해자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생애관도 마련돼 있다. 건물 외벽과 닿는, 가장 해가 잘 드는 곳에는 추모관이 자리했다. 추모관 입구에는 관람객이 자유롭게 헌화할 수 있도록 빨간 장미가 준비돼 있었다. 시든 꽃이 꽂혀 있는 자리에 장미를 꽂았다. 추모관을 이루는 검은 벽돌에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과 사진, 출생과 죽음이 새겨져 있다. 이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벽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빈 칸이다. 
 
  1층에는 전쟁과 전시성폭력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아놓은 벽면에서 정서운 할머니의 말과 마주쳤다. “내가 살아남은 게 꿈 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목소리도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경상도 사투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반대쪽 벽면에는 ‘분쟁 중에는 군인보다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시 성폭력 실황이 전시돼 있었다.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아이들이 입는 피해 현황과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베트남 여성들의 아픔에 대한 기획 전시도 진행 중이었다. 
 
  박물관 뜰에는 길원옥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의 동상이 있었다. 박물관을 나오자 관람객들의 메시지가 쓰여 있는 노란 나비 벽이 이어졌다. 나비들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벽에 빼곡히 매달려 있었다. 이동하는 길에 또 한 분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서른다섯 명으로 줄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서른여섯 명이었고, 불과 이틀 전까지는 서른일곱 명이었다.
 
  5시, 중구 /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기억의 터’는 평화·인권활동가로 생을 보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메시지를 계승하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기억의 터 디딤돌 쌓기’ 운동을 통해 1만9천755명의 참여로 조성돼 더욱 의미가 깊다.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는 “기억의 터가 이 땅에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깃들도록 하는 배움의 장이자 사색의 터가 되길 기대한다”고전한 바 있다. 그에 비해 이곳은 입구에서 전경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소박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휴식을 취하러 나온 직장인 몇몇이 전부일 만큼 고요했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대지의 눈’이었다.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였던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과 피해자들의 실제 증언, 피해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대지의 눈을 지나면 통감관저터 비석을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기억의 터가 조성된 곳이 과거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이 한일강제합병조약을 체결한 한국통감관저가 세워져 있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비석 건너편에는 ‘거꾸로 세운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는 을사늑약의 발판을 닦은 하야시 곤스케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운 동상으로, 명예롭지 못한 역사를 반성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통감관저터 비석과 거꾸로 세운 동상 사잇길을 넘어가면 ‘세상의 배꼽’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이곳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문구 근처에 있는 돌 위에 앉아 오래도록 ‘기억’을 바라봤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과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기억 속에 숨겨진 단단한 힘일 것이다.

  기억의 터에서 내려오는 길에 대한적십자사와 마주쳤다. 적십자사 건물 외벽에는 ‘광복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이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1945년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입은 한국인을 찾아 복지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기억의 터로 향하는 동안 마주쳤던 번화가들을 떠올렸다. 마포구에서 중구로 가는 길은 내내 번화가였다. 마포08과 7011을 타고 홍대, 신촌, 이대, 명동을 지났다. 서울의 높고 화려한 건물들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땅과 사람들을 딛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지금 당연하게 누리는 평화가 언젠가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매주 수요일마다 거리에 서고 먼 나라까지 우리 문제를 알리러 간다”는 길원옥 할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평화로운 세상을 얻은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살아온 사람들을 기억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목소리를 보태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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