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자 여사(1912~1968)는 본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으로 일본 이름은 다우치 치즈코(田内 千鶴子)이다. 윤학자 여사의 한국 이름인 윤학자(尹鶴子)는 남편 윤치호 전도사의 성씨인 윤(尹)에 자신의 일본 이름 치즈코(千鶴子)를 따와 붙인 것이다. 윤학자 여사는 1912년에 일본 고치현에 위치한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소속의 관리로 임명되어 아버지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왔다가 아버지의 사후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게 된 것에서부터다. 그즈음 목포에는 윤치호 전도사가 ‘공생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고아원을 세워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윤학자 여사는 공생원에서 음악교사로 봉사를 하다가 윤치호 전도사와 부부의 연을 맺고 부부가 함께 고아들을 돌보는 삶을 시작한다. 윤학자 여사가 윤치호 전도사에게 청혼을 했다고 하는데, 기독교 신자로서의 신앙심, 일제의 폭정으로 고통받는 조선인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마음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일제의 패망 이후 광복이 되자 윤학자 여사는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초를 당할 뻔했으나, 그녀가 공생원에서 조선의 고아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밤낮없이 돌봐온 것을 익히 잘 아는 마을 주민들이 도움을 주어 화를 면하게 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목포에도 인민군이 몰려들자 이웃들은 윤학자 부부에게 피난을 권유하지만 어린 고아들을 돌봐줄 사람 없이 두고 갈 수는 없다는 이유로 윤학자 부부는 공생원을 떠나지 않았다. 윤학자 부부는 목포가 인민군 치하에 들어간 후 곧바로 인민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또다시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옹호해준 덕분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목숨을 건진 대신 공생원에는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설치되었고 남편 윤치호 전도사는 자기 의지와는 관계없이 목포 죽교동의 인민위원장을 맡아야만 했다. 이들 부부는 인민군 철수 이후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고나서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인민군과 국군 양쪽 모두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남편 윤치호 전도사는 1951년 1월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식량난으로 공생원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전남도청이 있었던 광주광역시에 식량지원 요청을 하러 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만다.
 
  남편 윤치호 전도사의 행방불명 이후 공생원의 운영과 관리는 전적으로 윤학자 여사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윤학자 여사는 어려운 상황과 조건 가운데에서도 고아들을 최선을 다해 돌봤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된 그녀의 노력은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감동을 이끌어 내어 1963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 1967년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명예를 얻기도 했다. 1965년 목포시가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가 될만한 인물을 선정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했는데 윤학자 여사에게 목포시민상을 수여해야 한다는 압도적인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일본과 다시 국교를 수교한 것이 1965년의 일이고 그 전까지 일본인에 대한 불신과 편견이 지배적이었던 사회분위기를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윤학자 여사가 살아온 삶이 목포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진심 어린 봉사와 헌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윤학자 여사는 1968년 58세의 나이로 별세하기 전까지 3000여 명 고아들을 돌봤다고 한다. 윤학자 여사의 장례는 목포시 최초의 목포 시민장으로 치뤄졌는데,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에 3만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해 윤학자 여사의 죽음을 슬퍼하며 봉사와 헌신으로 살아온 그녀의 생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윤학자 여사의 이야기는 1995년 <사랑의 묵시록>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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