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옥(1901~1988)의 이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다. 그녀가 우리 역사에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 조종사 자격을 땄고, 직접 비행기를 몰아 하늘을 날았기 때문이다.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은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공장에서 일해야만 했기에 또래보다 다소 늦은 12살이 되어서야 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소학교 졸업 후에는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숭의여학교에서의 생활은 권기옥에게 있어 민족의식을 키우고, 일제에 의해 억압받는 조선이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바지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울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숭의여학교는 학풍에 있어 민족 주체의식이 뚜렷해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와 더불어 ‘평양의 3숭’이라 불리던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1913년 9월 비밀리에 ‘송죽회(송죽결사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주체적으로 항일운동을 했는데 권기옥 또한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1919년 3·1운동 직전 권기옥은 교사 박현숙의 지도를 받아 학우들과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 시위를 준비했고, 3월 1일 만세 시위에 참가했으며 3월 4일에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3주 동안 구류된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이후 권기옥은 본격적인 항일투쟁 활동에 나서게 된다.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들과 임시정부 공채를 판매하기도 하고 모교 학생들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는데, 이때 여학생들이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가면서까지 돈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권기옥은 평양청년회의 활동을 돕다가 체포되어 조사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출옥 후 권기옥은 광복군총영 소속 문일민과 함께 평남도청 폭파라는 거사를 성공시켰는데 이로 인해 청사의 담장이 무너졌고 일경 2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후 권기옥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활동하는 동지들과 접선하기 위한 방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해 전도활동을 가장해 전국을 순회·강연하며 비밀공작을 한다. 그러나 일련의 활동이 전도가 아닌 항일활동이라는 것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권기옥은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한다.

  망명지에서 권기옥은 이승만, 안창호 등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 권기옥은 임시정부 소속 이시영 선생의 추천을 받아 1923년 윈난(雲南)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 1925년에 비행사 자격을 취득하고 중국군 혁명 장군 펑위샹(馮玉祥) 휘하의 공군(당시 임시정부는 전투기는커녕 정규군조차 갖지 못한 상황이어서 비행기를 갖고 있는 중국군에 몸담을 수밖에 없었다.)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복무한다.

  언론보도를 통해 조선인 여성 조종사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제는 권기옥의 항일투쟁 경력에 주목하고 그녀를 암살하려 했다(일제의 암살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일제는 권기옥을 언제든 사살하겠다고 통보했다.). 권기옥은 임시정부 직할로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해 사교부장을 맡기도 했고, 광복 3년 뒤인 1948년 8월 고국에 돌아와서는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내는 등 한국 공군 창설에도 기여한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일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권기옥은 전 재산을 장학 사업을 위해 기부, 장충동2가 소재의 낡은 목조 건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 4월 19
일에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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