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뉴욕과 에딘버러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선교대회는 피선교지에서 교파간 연합사업의 추진을 장려하였다. 한국에서도 선교사들 사이에 교파간 연합사업안이 공론화되었고, 베어드는 1905년 6월 북감리교선교회 총회에 참석하여 한국 내 고등교육에 있어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동 방안을 제의하였다. 감리교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6년 ‘숭실학당’ 내에 ‘대학부’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국내 최초의 근대대학인 ‘숭실대학’이 탄생하였다.
 
  ‘숭실대학’이 출범하자, 장로교는 교수진으로 교장인 베어드 부부와 맥큔 등을 임명하였고, 감리교는 베커와 빌링스, 루퍼스 등 세 사람을 지원하였다. 장·감 선교회의 연합으로 학생 수가 급속히 증가하자, 교사 증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베어드는 평양 교인들과 주민들로부터 6,000원과 미국 제일감리교회로부터 2,500달러를 기부받아 과학관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 선교회의 기부금 7,000달러와 미국교회의 도움으로 3층 양옥의 대학본관 건물을 준공하였다. 이 밖에도 기상대, 박물관, 체육관, 기숙사, 기계창, 교수사택 등을 설치하여 당대 최고의 캠퍼스가 되었다. 
 
  한편, 베어드는 숭실대학의 수업연한을 4년으로 정하고, 초기 교과목으로 성서, 수학, 자연과학, 역사학, 인문과학, 어학(영어), 음악 등을 가르쳤다. 1912년에는 물리, 생물, 화학, 농학, 지질학, 광물학 등 자연과학과 경제학, 경제사, 사회학, 민법 등 사회과학분야의 과목들을 개설하여 명실상부한 대학의 교과과정을 마련하였다. 
 
  이 같은 ‘숭실대학’의 설립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근거한 교회연합사업의 이상적인 모델이었으며, 대학의 시설과 교과과정은 조선선교회 교육시스템의 최정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베어드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초등학교로부터 대학부까지 일관한 기독교학교체제를 관서지방에 건립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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