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 중앙학술정보관 앞에는 유학자의 동상이 하나 세워져있다. 일반적으로 유학자의 동상이라면 단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유학자의 동상은 바람에 휘날리는 두루마기를 걸치고 하늘을 향해 굳게 쥔 주먹을 쭉 뻗은, 역동적인 모습과 신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유학자의 동상은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1879.7.10.~1962.5.10)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김창숙 선생은 1879년 7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사면 칠봉동에서 유림으로 명망 높은 김호림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명문가답게 가풍은 엄격했으나 김창숙 선생의 아버지 김호림은 당시 일반 양반과는 달리 상당히 개화된 생각을 가진 유학자였다고 한다(일하는데 있어 귀천을 따지지 않았으며, 고용인이 더 나이가 많으면 장유유서로서 먼저 식사하게 하는 등 열린 자세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김창숙 선생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향리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자라면서도 유교경전을 외우고 논하는 것이 학문의 전부라 생각하지 않았다. 김창숙 선생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하던 성인의 뜻에 깨우침이 없으면 이것은 거짓 선비다. 지금 나랏일을 의논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런 부류의 선비를 없앤 다음이라야 비로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방법을 논하는 데에 참여할 수가 있다’고 밝히며 구국활동에 앞장섰다.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자신의 스승 이승희 선생(상소문에 맨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는 사람, 소두疏頭가 이승희 선생이었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을사오적을 성토하며 그들의 목을 칠 것을 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다. 허나 이미 나라의 주권이랄 것을 모조리 상실해 버린 조정과 임금이 상소에 답을 줄 수 있을 리 없었고 김창숙 선생은 이 상소로 인해 옥고를 치르게 된다. 김창숙 선생은 1908년 대한협회 설립 이후 고향인 성주군의 향사당에 대한협회 성주군지부를 설치, 총무에 취임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우리들이 이 회(會)를 설치한 것은 장차 조국을 구원하려는 것이다. 조국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옛 인습을 개혁하는 것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다 옛 인습을 개혁하고자 한다면 계급을 타파하는 것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며, 계급을 타파하고자 한다면 우리 회로부터 시작함이 마땅하다’라고 주장하며 개혁정신을 피력하고 식자들에게 독립의지를 불어넣는데 힘썼다.
 
  김창숙 선생은 1919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유림 대표들의 서명이 담긴 독립진정서를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우송했고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1919년 광복운동 모금 활동 중에 체포된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의 자격으로 쑨원과 교섭하여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기도 했다. 1927년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 압송되어 징역 14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에는 유도회를 조직,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학장으로 취임한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학자로 교육받고 살아왔지만 망국과 독립, 6‧25로 인한 남북분단, 독재 등 격동했던 우리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불의와 폭력에 억압받는 우리 민족을 위해 투쟁의 삶을 살았던 김창숙 선생. 애국애족의 마음과 유학자의 선비정신으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김창숙 선생에게는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고, 선생은 그 해 5월 10일 별세,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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