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흐름에 의해 ‘조선에 하나의 연합대학’ 구상이 떠 오른 것이 1912년이었다. 하지만 그 설치 장소에 대해 평양이 좋은지 서울이 좋은지 여부가 초점이 되어 조선의 각 선교부에서 대논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대학문제’였다. 이 문제의 발단은 1912년 3월 감리교 선교부의 결의였다. ‘전 한국에 하나의 대학을 설립하여 운영하되 그 대학의 위치는 서울로 한다’는 이 결의는 평양 숭실대학의 폐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교부를 대표하는 교육위원회에 상정되었다. 교육위원회가 각 선교부의 의견을 조사하자,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선교부는 모두 평양 숭실대학을 폐교하고 서울에 다른 대학을 설립하려는 감리교의 주장을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감리교 측이 주장을 철회하지 않자, 교육위원회는 이 문제를 표결에 부쳤다. 표결결과 교육위원회는 대학위치로 평양을 지지하였고, 선교사들도 평양 63표 서울 37표로 평양을 지지하였다. 교육위원회는 그 결과를 미국의 합동위원회에 보고하고 이 문제의 결정을 위임하였다.
 
  교육위원회로부터 위임을 받은 미국의 합동위원회는 이 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합동위원회는 대학의 위치로 서울을 정하였고, 미국 선교본부도 이를 승인했다. 한국선교부는 즉각 이를 거부하였고 길고도 격렬한 항의를 지속하였다. 1915년이 되면서 한국선교부는 대학문제의 최종해결책으로 미국 장로회 총회에 호소하였다. 총회는 이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고 또 많은 서신들을 검토한 후 평양 숭실대학의 존치와 서울에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감리교는 1914년 평양 숭실의 경영에서 탈퇴하고 1916년 서울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조선 기독교대학, 곧 연희대학을 발족시켰다.
 
  대학문제의 후유증으로 베어드는 1916년 3월 31일 숭실대학 교장직을 사임하였고, 안타깝게도 언더우드는 암이 발병하여 1916년 미국에서 서거하였다. 이 대학문제는 대학의 설치 장소뿐아니라 교육이념과 성격에 관한 문제였다. 선교사들 사이에는 ‘평양이 복음적’이고 ‘서울은 세속적인 교육’을 중시한다는 이해가 있었다. 곧 숭실대학의 ‘토착적 기독교교육론’과 연희대학의 ‘기독교사회교육론’의 대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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