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순은 구한말 활동한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다. 윤희순은 1860년 경기도 구리 출생으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윤희순은 16세가 되던 1876년에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자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이기도 한 유제원과 혼인했다. 윤희순은 혼인 후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을 받아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된다. 

  1895년 을미사변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일제는 단발령을 발표해 강제 시행한다. 이것이 조선인의 마음속에 누적된 반일감정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윤희순의 시아버지인 유홍석도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윤희순은 최초의 한글 의병가인 <안사람 의병가>와 <병정가> 등 여러 노래를 창작하고 의병들에게 보급해 사기를 증진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한다. 또한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제목의 경고문으로 일제를 꾸짖었고, 일제의 억압과 폭력에 조선의 여성들도 맞서 싸울 것을 천명한다(윤희순은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는데, 이는 최초의 한글 의병가이자 민족 저항 시가로 평가받는다).
 
  1907년 고종은 비밀리에 헤이그 특사를 보냈던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어 강제 퇴위를 당하게 되고, 일제는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전권을 이용해 대한제국에 불평등조약인 정미7조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국권을 장악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행정권은 일제에 박탈되고 대한제국군은 해산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전국적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는데, 시아버지가 의병장으로 싸울 때 윤희순은 군자금을 모아 탄환과 기타 무기의 재료가 되는 놋쇠와 구리 등을 사들였고 화승총에 사용할 화약을 직접 제작하고 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했다. 윤희순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으나, 여자 의병 30여 명을 모집해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 남장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거나 전투에 참여하는 의병들을 뒷바라지해주는 등 의병 군의 든든한 후방지원이 되어주었다. 
 
  1911년 윤희순은 시아버지 유홍석과 남편 유제원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고, 1912년 환인현으로 이주해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군자금을 모은다. 이후 항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학당(勞學堂)을 창립, 50여 명의 항일 운동가를 길러냈다. 험난한 항일운동 과정에서 1913년 시아버지가 사망하고, 1915년에 남편마저 세상을 뜬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노학당마저 폐교되자 윤희순은 무순(撫順)으로 이주하여 중국인들과 협력해 조선독립단을 만들었고, 1926년에는 조선독립단 가족부대, 조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한다. 1932년 무순에서 항일 운동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자 봉성현 석성 등지로 옮겨 항일운동을 지속해서 전개했다. 1935년 7월 장남이 제사를 지내러 집에 들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하자 윤희순은 아들의 죽음 앞에 울분을 터뜨린다.
 
  윤희순은 <해주 윤 씨 일생록>을 남겨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 후 곡기를 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35년 8월 1일 윤희순은 숨을 거둔다. 평생을 항일과 독립에 힘썼지만, 조선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의 땅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허나 시아버지, 남편, 아들과 함께 3대에 걸쳐 여성과 청년들에게 항일투쟁 의식을 고취시킨 윤희순의 업적은 그녀의 사후에도 후대들의 독립운동에 큰 도움으로 남았다. 윤희순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유해는 1994년 중국 지린에서 고국으로 봉환되어 춘천에 위치한 선영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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