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시작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사상 통일을 이루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에서는 1932년 9월 처음으로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를 개최하고 기독교계 학교도 참석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숭실전문학교를 위시한 10여 개의 기독교 학교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의식으로 이해하고 행사 참여를 거부하였고, 일제는 기독교 학교에 대해 감시를 시작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직접적 제재를 가한 것은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1935년 11월 평남 도청에서 개최된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 회의에서 도지사가 평양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자,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은 교리와 양심상 이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평남지사 야스다케는 앞으로 신사참배 불응 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을 경고하였다.
 
  일제의 강경한 태도에 평양선교 사회는 12월 윤산온의 집에 모여 신사참배 문제를 토의하여 종교적 이유를 들어 거부키로 하고 이를 도 당국에 전달하였다. 이에 평남지사는 윤산온과 마포삼열을 도청으로 조치하여 신사참배를 재차 강요하였고, 불응 시 교장의 사표 제출과 학교를 폐쇄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윤산온과 마포삼열은 평양선교 사회를 소집하여 신사참배 문제를 재차 토의에 부치고 평양신학교 교수 박형룡과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의 의견을 물은 후 신사참배 거부를 다시금 천명하였다. 이에 총독부는 1936년 1월 20일 윤산온의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을 취소하였다. 
 
  북 장로회 선교회는 한때 교회지도자들 사이에 역사 깊은 학교의 폐교는 삼가야 한다는 여론이 있어 숭실전문학교 교장에 모의리 선교사를 선임하고, 학교의 존속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노골화되고, 남 장로회가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라는 것을 엄격히 규명하고 폐교를 불사한다는 ‘풀톤성명’을 발표하자, 북 장로회 선교회는 1937년 10월 29일 40년간 이어져 온 근대 고등교육의 효시 숭실중학과 숭실전문학교의 자진 폐교를 결정하고 총독부에 폐교원을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1987년 창설된 숭실학당에서 발전한 숭실전문학교는 숭실중학, 숭의여학교와 함께 1938년 3월 자진 폐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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