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시작된 미투 운동이 한창이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미투는 항상 있었지만 주류 언론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뿐이다. 일상을 살면서도 내 앞에 놓인 선택지들을 고르기 바빠서 이것이 어떤 구조를 통해서 내 눈앞에 있는지 잊기 마련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 구조인 경제학에 대해 간단하게 배우지만 기억나는 것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정도이다.

  바로 그 ‘애덤 스미스’는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서 충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가 빼먹은 것이 있었다. 그가 연구를 하면서도 밥을 먹고 입고 잘 수 있게 한 어머니의 ‘돌봄노동’이다. 경제학은 시작될 때부터 여성의 노동은 포함되지 않았다. 1950년대 들어서 시카고 학파의 ‘게리 베커’라는 경제학자가 가사노동, 차별, 가정생활과 같은 모델을 경제학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여성의 보수가 적다면 여성이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보수가 낮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
고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언어로 이런 차별을 합리화했다. 현대에 들어서 여성이 보다 사회에 많이 진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성의 노동을 다른 여성의 노동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고 생각하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뵌 청소부는 거의 다 여성분이고 식당의 허드렛일은 전부 여성이다.

  작가는 묻는다. 어머니가 애덤 스미스를 필요로 하였나? 아니면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를 필요로 하였나?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감정과 과학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제적 인간’의 선택이 일치하였을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나의 감정에 대한 용기를, 경제적 인간은 허구라는 언어를 얻었다. 무엇보다, 지금도 누군가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경제학을 사용하는 것을 날카롭게 비판할 자신감을 얻었다. 학우분들 중에서도 ‘어머니’의 노동에 대해 한번이라도 질문한 적이 있다면 꼭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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