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온 나라 안이 시끌벅적 난리가 아닙니다. 아니, 세계 곳곳의 여론이 미투운동으로 어수선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 년이나 이 년, 십여 년이 넘도록 곪아왔던 상처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동시대인들의 시선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인가요? 무엇이 문제이기에 사태가 이토록 점입가경을 보이는 건가요? 유력했던 차기 대권주자를 한순간 낙마시키는가 하면, 국정에 여념이 없어야 할 전‧현직 국회의원들을 벌벌 떨게 하고 있는 저 미투운동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인문학도의 한 사람인 저는 이 물음을 무지몽매한 인문정신의 결여와 인문 교양교육의 부재로써 접근하고자 합니다. 교양교육이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선순환적으로 시너지를 이루어가도록 도와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는 행위를 통하여 인지능력의 대부분이 형성된다는 말은, 역시 보이는 행위의 비중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대변합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대명사는 나와 남, 남자와 여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기득권층과 소외계층, 성인과 미성년자. 갑과 을의 관계 등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와 남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정신을 외면한다면 인문 교양교육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 세기 이전 베르그송이 역설했던 자유정신의 핵심인 직관(intuition)에 의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다름과 불일치가 폭력이 아닌 배려와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휴머니즘은 개화할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는 보는 것만을 중요시하면서 보이는 것과의 직관적인 관계를 외면하는 편협한 사고, 사실과 팩트에 한정된 인지적 사고만으로는 결코 환원될 수도 그래서도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표현은 인간이 생물학적인 성(sex)과 이에 기인하는 쾌락의 노예가 되어 그 세계를 넘어서는 메타인 지적인 가치와 인간다움의 세계에 문외한인 그런 사람에게 하는 말일 것입니다.

  휴머니즘이 대세이며 인성(人性)이 곧 실력인 시대가 도래한다면 언젠가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도 그 시의성을 상실하게 되리라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우리 사회에서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당연시되었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나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이에 최근 전개되고 있는 미투운동은 휴머니즘을 기치로 역사와 인류 문명사의 흐름 앞에 당당 하고자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목소리와 몸짓이라고 이해하면서 부족한 지면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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