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마다 다가오는 지구촌 최대의 겨울 축제, 동계올림픽. 동계올림픽마다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가 있다. 바로 20년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상아 해설위원의 목소리이다. 정확하고 차분하지만, 때론 마음을 울리는 따뜻한 해설로 시청자들의 곁을 지킨 방상아 해설위원. 6살에 피겨를 시작해 피겨 국가대표 선수, 코치, 지금은 본교 스포츠학부의 겸임교수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는 방상아 해설위원의 피겨 인생과 평창동계올림픽에서의 이야기를 본지에 생생히 담아보았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SBS 피겨스케이팅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상아입니다. 지금은 숭실대학교 스포츠학부의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고 피겨스케이팅 지도자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처음 피겨를 시작할 때만 해도 피겨가 지금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피겨스케이팅을 처음 접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여섯 살 때쯤이었어요. 제 오빠가 동계스포츠를 가르치는 ‘리라초등학교’에서 먼저 스피드스케이팅을 배우고 있었죠. 오빠를 보고 저도 어머님께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고 졸랐어요. 부모님께 흔쾌히 허락을 받았고, 결국 제게 맞는 스케이트화도 없던 어린 시절부터 스케이트를 타게 됐죠. 오빠처럼 리라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빙상부에 들어가서 피겨를 배웠어요. 이후 피겨를 잠시 쉬는 일도 있었지만, 중학생 때부터는 ‘이 길이 내 길이다’라는 확신을 느끼며 피겨를 계속 했었죠. 그 당시에는 많은 선수들이 중학생 때 피겨를 그만뒀어요. 여자 운동선수에 대한 편견도 심했고, 또 피겨라는 종목도 미래가 불투명했거든요. 감사한 것은 부모님께서 제 선택을 존중해 주신 거예요. 어머님도 여자 운동선수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지만 “쉽진 않겠지만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 네가 그 길의 개척자가 되렴.”이라며 응원해주셨죠. 저를 지지해주시는 부모님을 만났던 덕에 그 이후로는 피겨의 길을 쉬지 않고 걸었어요. 하지만 대학에 들어갈 때가 돼서는 우리나라 피겨 종목의 열악함에 좌절도 많이 했죠. 우리나라 피겨의 현실이 너무 척박하고 서럽구나…. 당시 피겨종목의 지도자도 많이 없다보니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절실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교 3학년 초에 국가대표를 은퇴하고 이후에 지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16년을 선수로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피겨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피겨 해설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교 3학년 때 선수를 그만두고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이후 대학원에 가서 석사학위를 땄고, 대학원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어린 선수들을 가르쳤어요. 1989년 목동 아이스링크장이 개장하면서 목동 아이스링크장의 메인 코치가 되었고요. 그 다음에는 엘리트 스포츠 꼬마들을 키워내서 국가대표 선수로 만들기도 했어요. 그러다 제가 스물일곱 살 때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피겨 국제대회인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 가 개최됐었는데, 그때 마침 개국한 SBS에서 스포츠 관련 PD를 맡고 계셨던 학부형이 저를 해설위원으로 추천해주셨어요. 이후 커리어가 좋은 후배에게 밀려나기도 했지만 결국 제가 방송국의 지속적인 요청을 받았고, 김연아 선수가 국제 대회에서 주목받게 되면서 점점 코치 일보다는 해설위원으로서의 일이 많아지게 되었죠.

 처음 해설위원을 맡으셨을 땐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원래 직업이 방송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방송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이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방송 중에 웃어도 되는 건지…. 그렇게 방송을 하던 초반에 굉장히 힘든 일도 많았어요. 피겨 팬들의 공격을 받다보니 그게 너무 상처가 돼서 ‘이런 소리 들으면서 해설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래도 ‘내 명예만 회복하고 그만둬야겠다’며 마지막 용기를 내서 해설을 했어요. 그런데 결과가 굉장히 좋았어요. 저를 적대시했던 팬들이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돌려주셨거든요. 그렇게 방송을 여태까지 한 거죠.

 피겨 해설위원으로 매 올림픽마다 방송국의 요청을 받으시며 많은 피겨 팬들의 사랑을 받으시고 계십니다. 방송계에서 인정받을만한 교수님만의 강점이 있나요?

  방송을 처음 시작할 땐 틀린 것에 대한 지적도 많았고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혼도 많이 났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길을 갈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받아들였어요. 저도 운동을 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도 있지만, 제가 처음부터 방송인은 아니었으니까 저를 낮추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를 질타하는 분들에게도 자문을 구하기도 하면서 저를 계속 낮추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처음 방송을 시작할 때 준비를 해갔던 것만큼 계속 준비를 해가는 거죠. 저는 말을 잘해서 해설위원이 된 것도 아니고 말주변이 좋지 않다 보니 언제나 준비를 철저하게 해요. 그래서 아직도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보려고 새벽에 일어나 아이스링크에 나가기도 해요. 이런 모습들이 방송국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 것 같기도 해요.

 숭실대학교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숭실대학교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요, 2010밴쿠버동계올림픽 때 우리 학교 교수님이 “숭실대학교 학생들에게도 피겨라는 멋진 종목을 경험하도록 해주고 싶다” 며 숭실대학교에서 강의를 해줄 수 있냐고 부탁 하셨어요. 그 부탁으로 2011년부터 숭실대학교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죠. 저는 다른 학교에서도 강의를 해봤지만 숭실대학교 학생들에게 정말 애착이 가요. 학생들이 굉장히 성실하고 참하더라고요. 열심히 배우고. 특히 남학생 중에 잘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이 강의를 계기로 피겨를 계 속 배우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오다가다 그런 학생들을 만나면 정말 보람찼어요. 그리고 이 강의를 학생들이 굉장히 기대해주고 좋아해줘서 즐거운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리고 숭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도 땄고요.

  선수에서 코치로, 그리고 해설위원과 교수까지. 삶의 다양한 변화를 겪으시며 쉬지 않고 도전하셨습니다. 그런 도전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저는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에요. 하지만 알게 모르게 이북 사람이셨던 어머니의 강단이 유전자 안에 녹아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계속 열정을 쏟아낼 수 있었던 원동력의 하나는 어머니예요. 어머니는 항상 제게 “내 청춘 다 바쳐서 너를 가르쳤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전 제 일이 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 혼자 그만두는 것은 쉽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저에게 청춘을 다 바쳤기 때문에, 저는 ‘어머니를 위해 죽을 만큼 힘들 때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 었어요. 어머니는 제게 “너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보다는 평생 직업을 물려주는게 나을게 같다”고 얘기하기도 하셨죠. 어머니가 물려주신 평생 직업을 쉽게 포기할 순 없었어요. 그래서 정말 힘들 때 무식하게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의 힘이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다른 원동력은 제가 방송을 하면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한 거예요. 처음에는 방송 사고를 내기도 했지만 계속 노력하다보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을 제가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정도 노력하니 결국엔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구나’, ‘뭐든 노력하면 못 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것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제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며 제 한계를 깨트렸고, 이게 다른 것에도 도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던 것 같아요.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나요?

  우리나라 모든 선수들이 다 기억에 남지만, 특히 차준환 선수와 최다빈 선수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차준환 선수는 작년에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어요. 3차전으로 이루어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2차전까지 점수가 너무 좋지 않았고, 부상도 잦았어요. 어린 나이에 시니어 무대에 나가 상처도 많이 받았고요. 올림픽을 위해 입국했을 때에도 독감에 걸린 상태였어요. 그래서 격리가 되어 생활하고, 따로 훈련을 하고…. 이렇게 힘들고 거친 환경을 그 어린 선수가 이겨낸게 드라마잖아요. 화려한 무대 뒤에 감춰진 좌절과 극복에 대한 모습 때문인지 차준환 선수가 기억에 남아요. 또 최다빈 선수는 가장 중요한 작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님을 여의었어요. 모든 어머니들은 희생적이시지만 ‘피겨맘’들은 마치 연예인 매니저처럼 엄청난 희생을 하며 선수와 항상 함께해요. 그런데 최다빈 선수는 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어머님을 여의었고, 선수가 그걸 이겨내는 건 너무나 큰일이었어요. 저도 그 사정을 알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최다빈 선수가 경기를 할 때 제가 해설을 하다 울컥할까봐, 경기 초반부터 울음을 터트릴까봐 걱정도 했어요. 선발전 때 최다빈 선수의 기량이 별로 안 좋았는데도 결국 올림픽에서 너무 잘 해줬죠.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네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는 우리나라 아이스댄스 팀에서 여자 선수의 의상이 풀린 게 기억에 남아요. 제가 그 순간의 장면을 못 봤고 시청자들에게 알리지 못했거든요. 사실 아이스댄스는 굉장히 공부할 게 많은 종목이에요. 기존 피겨 종목과 룰도 전혀 다르고, 그 룰도 매년 바뀌어요. 아이스댄스 종목 중계를 매년 하는 것도 아니라서 이번 올림픽에서도 아이스댄스 해설을 위해 공부 할 게 정말 많았어요. 그때도 해설 도중에 기술적인 내용을 잠깐 공부하려고 살짝 밑을 봤는데 그 순간 상황이 벌어졌던 거죠. 그래서 그 장면을 못 봤고, 시청자들에게 알리지 못했어요. 그 부분에 대해 안타까움이 커서 그때가 기억에 남네요. 또 아이스댄스 프랑스 메달리스트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피겨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 아이스댄스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네요. 또 재밌는 에피소드로는, 우리 숭실대학교 교수님이시고 이번에 컬링 해설위원을 맡으신 윤형기 교수님과의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나라 방송 3사 중엔 제가 해설을 맡았던 SBS에서만 피겨 갈라쇼를 생방송으로 중계하기로 했었어요. 직접 현장까지 가서 생방송을 딱 들어가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여자 컬링팀이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 거에요. 그런데 컬링 여자 결승전과 갈라쇼가 거의 같은 시간에 배정이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피겨 갈라쇼는 녹화만 되고 아직까지도 방송이 안 됐어요. 그때 윤형기 교수님이 ‘이런 날도 오네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기억이 나네요.

 평창동계올림픽을 포함해 그동안 총 5번의 올림픽에서 해설위원으로 참여하셨는데요. 그 중 가장 인상 싶었던 무대가 있나요?

  아무래도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딴 무대겠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피겨계에 정말 완벽한 경기를 해냈잖아요. 사실 밴쿠버동계올림픽이 열리기 4년 전만 해도 일본이 피겨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우리나라가 상을 받을 거라고 크게 기대할 수 없었거든요. ‘일본이 저렇게 앞서 나가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멀었구나’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4년 후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아사다 마오 선수를 완전히 밀어내며 압승을 거뒀는데 너무 감격했죠. 제가 그 영광스러운 현장에 있었고, 제 목소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 덕분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져요.

 스포츠 해설위원을 꿈으로 가진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감사하게도 저는 해설위원의 기회가 운 좋게 주어졌어요. 기회는 우연히 오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사람들은 우연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두려움 때문에, 용기가 없어서 그 기회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많아요. 하지만 반드시 도전해보세 요. 본인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지라도 ‘나에게는 그 이상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게 정말로 중요해요. 제가 선수들을 지도할 때에도 ‘너 자신을 믿어라’라고 말하곤 해요. 자신을 믿고 주어진 기회를 잡는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계획은…. 젊었을 때는 1년, 5년, 10년 계획을 짜서 생활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달 계획, 하루 계획이 다예요. 코치, 교수, 엄마.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잖아요. 틈틈이 일을 해야 하다 보니 하루를 좀 더 세분화해서 생활해야 해요. 그래서 지금은 오늘의 할 일, 한 달 동안 해야 할 일을 정해서 생활하고 있어요. 방송도 욕심만 가지고 하는 일은 아닌 것 같 아요.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또 나에게 다른 일이 주어진다면 그 일을 하는 거죠. 저는 방송을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해왔어요. 밴쿠버동계올림픽 때도 그랬고, 소치동계올림픽 때는 ‘연아의 은퇴가 곧 나의 은퇴다’라며 해설에 정말 최선을 다했죠. 이번 평창동계올림픽 때도 물론 부족한 점이 많았겠지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며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해설했어요. 방송이라는 것이 제가 언제까지 부름을 받을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방송을 시작하면서 좀 바뀌었다고 했잖아요. 방송을 한 이후에는 ‘어떤 도전이든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만약 제게 아이스링크 경영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래서 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싶어요. 그럼 저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 생기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동문회 선배들을 만나면 그 선배들은 저보다 10살, 20살 나이가 많으세요. 그런데 선배들을 보면 지금도 열심히 달리고 계세요. 저 스스로 ‘열심히 달려왔다’, ‘이젠 좀 느슨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한국을 움직이는 여성 리더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는 선배들을 만나면서 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게 돼요. 그래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숭실대학교의 겸임교수로서, 피겨계의 선배로서 또 모교의 선배로서 귀감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방송 일을 하다 보니 제가 맡은 역할보다는 좀 더 나은 인지도를 갖게 됐잖아요. 그래서 제가 앞서 살아간 사람으로서 제 후배들이나 제자들한테 좋은 선배와 스승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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