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했는데 이제 그 말은 10년이면 시대가 바뀐다고 수정되어야 할 듯싶다. 새로운 기술과 지식정보가 시시각각 홍수처럼 밀려와 눈앞의 것이 금세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다. 정보통신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우리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얼마든지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빠르면 수년 내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지식인에 물어보는 대신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는 것이 일상화될 것이다. 간단한 정보검색으로 알 수 있는 것 정도는 인공지능이 답해줄 수 있는 기술수준을 이미 진즉에 지나왔고, 인공지능 플랫폼이 탑재된 가전제품이 가정용으로도 판매되고 있다. 인공지능 가전제품(현재까지는 보통 스피커의 형태)은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들에게 유용한 양육 보조 도구가 되어주고 있는데, 영유아 때부터 인공지능을 접하여 인공지능에 정서적 친숙함을 느끼는 아이들과 인간이 아닌 대상에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우리의 감각은 크게 다를 것이다. 인공지능이 지식의 양과 속도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를 살아갈 사람은 알고 싶은 것이 생기면 나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자료를 찾아보는 일의 의미에 대해 둔감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술의 발달이 무엇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의 크기와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는 우려 외에도 ‘앎’의 가치를 퇴색시키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가짜 지식인’이다. 시대의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해 방송 미디어에 출연, 자기가 쌓아온 지식을 대중에게 전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허나 이들 전부가 박학한 지식인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방송출연자인 지식인 자신이 진정성을 갖고 있다 해도 방송의 특성상,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내용이 아니면 편집을 통해 잘려 나가거나 왜곡된 형태로 전달될 수 있다. 또한 소위 대중적 호감도가 높은 지식인 중에는 실제로는 학식이 풍부하지 않고, 속물적이지만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잘 연출해서 대중에게 호감을 사 적지 않은 부와 사회적 지위를 손에 넣은 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의 실체가 어떠하든 문자로 지식과 사유를 구축한 결과인 책을 읽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기보다, 남의 생각을 듣는 게 더 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방송을 통해 강연과 교양프로그램을 보는 것으로 유사 독서행위를 하고 지적 만족감을 얻는다.

  앎의 의미와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와 남의 생각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앎이란 본래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아는 깨달음, 그리고 내가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직함을 본질로 한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했고,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 말했다. 동서양 철학의 성인들이 깨달은 앎의 본질은 지식의 양이 아니었다. 무엇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알지 못하고도 그것에 대해 알기를 원하지 않고 타인의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삼는 것, 남의 생각을 내 것처럼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인공지능이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와 그 양의 방대함을 우리가 따라 갈 수 없겠으나, 인공지능은 우리 중 누구든지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이 하나의 질문은 하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진정 알고 있는가?’ 라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습관화해야할 것은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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