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라틴어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에 어원을 둔다. ‘스투디아 후마니타스’는 인간성의 함양을 위한 덕목과 학습을 뜻한다. ‘후마니타스’는 라틴어지만, 더 파고 들어가면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의 말에 뿌리를 둔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그리스 철학의 인간 탐구 전통을 계승하여 ‘후마니타스’라는 개념을 정리했다. 수사학의 대가였던 키케로는 ‘후마니타스’를 수사학의 핵심적 개념으로 내세워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인본주의 전통을 확립하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후마니타스는 인본주의, 인문학 등의 의미로 확대·정착되었다. 인문학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쉽고 짧게 말해달라고 묻는다면,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인에 대해 이해함을 기본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인문학은 눈앞에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그 현상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근본에 대해 탐구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인문학은 보통 ‘문사철(문학,역사,철학)’로 대변되고 이것이 인문학의 정통 학문인 양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중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 이후 인간과 종교가 분리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문학은 과학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 학문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고전(古典)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학의 특성은 아날로그적인 것으로 취급받아,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 설 자리가 많이 줄어든 처지다. 

  대학 내 관련 학과가 통·폐합되고 학문연구자가 줄어든 것을 떠나, 사람들이 인문학 도서-특히나 고전을 읽지 않게 됨을 문제 삼아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인문학의 쓸모없음’에 대해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이 과거의 지식에 갇혀 있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나 새로운 가치를 판단하는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기술 간 융합이 이뤄지고,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나노기술 등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혁신적 연구 성과들이 쏟아지고 있으니 이른바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이자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기 어려운 인문학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지식과 사유를 바탕으로 구축해나가는 인문학 관련 학과들이 실적을 강요당해 위축되거나 본질에서 왜곡된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뭇 우려스러운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 언급한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받는 인문학을 지키기 위해 연설한 바 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65년, 대중영합주의로 권세를 얻은 폼페이우스 일파는 로마의 안전을 위협하는 부랑민과 폭력잡배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고, 이로 인해 제정된 파피우스 법에 따라 ‘아르키아스’라는 이름의 그리스계 안티오키아 출신의 시인이 추방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키케로는 시인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어린 시절 많은 사람의 가르침과 많은 글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자신은 결코 국가의 안전을 위해 자기 한 몸을 내던지지 않았을 것이며, 문자의 빛으로 지켜온 가치들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이끌고 지켜주었다고 변호한다. 평시에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주고, 지친 마음에 생기와 휴식을 불어넣어주는 것. 그것이 아르키아스 같은 시인들이 하는 일(학문)이기에 그들을 추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인문학을 별거 아닌 것,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이들은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로마의 몰락이 타 국가와의 물질적 부나 기술의 경쟁에서 밀려서가 아니라, ‘별거 아닌 것’인 인문학적 가치를 홀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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