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은 겨울에 피는 꽃으로, 추운 겨울에도 홀로 꽃망울을 맺기에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만개한 상태에서 '툭'하고 하얀 눈밭으로 떨어져 시들어버리는 꽃이기도 하다. 동백꽃은 4.3의 영혼들이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4.3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4.3은 남한 단독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와 미군정의 강압으로 발생한 민중 항쟁이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현재 14,231명. 미확인 희생자 수를 포함해 전체 희생자 수는 약 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1948년,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의 영혼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스러져갔다. 4.3이 발생하고 동백꽃은 예순아홉 번 피고 졌다. 2018년, 올해로 4.3은 70주년을 맞았다. 올해 1월에 핀 동백꽃은 아직 시들지 않았다.

 
  4.3을 다룬 소설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 작가는 이 사건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다. 그는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는 것.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는 것이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주도민은 4.3을 입 밖에 내놓지 못했다.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이었다. 일제가 물러난 뒤에도 친일파가 다시 권력을 잡았고, 그들은 저지른 과오를 숨겼다. 1968년부터 4.3은 교과서에서 다뤄지기는 했으나, ‘폭동’이나 ‘반란’으로 규정됐다. 이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행된 2003년에야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이 학살됐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4.3은 분단에 반대하고 통일 국가를 염원하던 제주도민의 열망이었다. 또한 4.3은 공권력에 의해 국민의 생명권이 유린된 안타까운 역사이기도 하다. 그 역사의 흔적을 생생히 담고자 본 기자는 제주도로 향했다.
 
  첫 번째 이야기, 남원면 의귀리
 
  피로 물든 의귀초등학교
 
  의귀리는 마을 남쪽에 ‘넋이 오름’이 아담하게 솟아있으며, 오름과 마을을 끼고 서중천이 유유히 돌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일제시대에는 면 소재지였을 정도로 남원면의 중심 마을이었다. 그러나 의귀리는 4.3 당시 진압군에 의해 마을이 불에 타버린 역사의 생채기를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의귀리의 중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의귀초등학교가 보였다. 자그마한 의귀초등학교 둘레에는 동백꽃이 만발한 동백나무가 즐비했다. 아이들은 동백나무를 그늘 삼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있었다. 나무 밑에 둘러앉아 손장난을 치기도 했다. 이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70년 전 그때의 일을 알고 있을까.
 
  과거 의귀초등학교에는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 신흥리 4개 마을의 아이들이 모였다. 그 아이들은 이곳에서 자라 꿈을 키웠다. 한창 아이들이 뛰어놀아야 했던 의귀초등학교는 4.3이 한창이던 1948년 12월 15일에 폐교됐고,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의귀리의 비극은 시작됐다. 이후 제주도 무장대가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해 전투가 크게 벌어졌다. 군인들은 학교 지붕에서 기관총으로 무장대를 향해 수천 발의 총알을 마구 쏘아댔고, 이 전투로 무장대 51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이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의귀초등학교에 수용 중이던 80여 명의 주민들을 학교 동녘 밭에서 학살했다. 그리고 시신들은 대충 흙만 덮은 채로 오랫동안 방치됐다. 이후 마을을 불태워버렸고, 의귀초등학교는 피로 물들었다.
 
  4.3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49년 8월, 의귀초등학교는 남원초등학교 의귀분교장으로 인가를 받고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1959년 의귀국민학교로 독립해 개교했으며, 2003년에는 4.3 당시 졸업하지 못했던 학생들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해 넋을 기렸다. 
 
의귀초등학교의 교정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혀
 
  유족들은 당시 의귀리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하고 1983년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다’는 뜻의 ‘현의합장묘’를 세웠다. 현의합장묘 정문에 들어서고, 정갈하게 벌초된 묘지들을 보자 절로 엄숙해졌다. 현재 현의합장묘는 의귀초등학교 동녘 밭에 대충 흙을 덮은 채 방치됐던 시신들을 옮겨 3개의 구덩이에 매장한 묘지이다. 시신 발굴 과정에서는 유골이 엉켜있던 상태였고 일부는 심하게 부식돼 그 흔적조차 없었다고 한다. 학살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짐작케 했다.
 
  그 현의합장묘 옛터에는 유허비를 세웠다.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다. 유허비에는 강덕환 시인의 비문이 쓰여 있었다. 그 비문을 가만히 되뇌었다.
 
  “이름 석 자 얻지 못한 어린아이에서부터 예순이 넘은 부모형제의 시신조차 제대로 감장하지 못한 아픔을 속으로만 삭이던 유족들은 그 후 묘역을 마련하고 단장하며 반세기가 넘도록 의로운 넋들이 함께 묻혔던 이곳에서 추모의 옷깃을 여며왔다…. (중략) 이곳에 발걸음 한 이들이여! 그대들 가슴에 인권의 소중함 품고 가시길 기원하며 이 비를 세운다.”
 
의귀리의 현의합장묘
 
 
  두 번째 이야기, 섯알 오름
 
  두 개의 구덩이, 섯알 오름 학살터
 
  섯알 오름 일대에 들어서면 탁 트인 바다 앞에 송악산의 오름이 동서로 크게 뻗어있다. 송악산의 오름은 세 개가 있다. 동쪽 것은 동알 오름, 서쪽 것은 섯알 오름, 가운데 것을 셋알 오름이라 한다. 오름 뒤에는 넓은 평야가 그림처럼 펼쳐져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학살이 이뤄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섯알 오름 학살터는 본래 일본군이 섯알 오름 일대를 요새화하면서 만든 폭탄 창고 터였다. 당시 일본군은 섯알 오름의 내부를 파내어 폭탄 창고로 사용했고, 오름의 정상에는 두 개의 진지를 구축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고 일본군이 만든 폭탄 창고 터는 제주도에 주둔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일부가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두 개 만들어졌다.
 
  이 두 개의 구덩이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해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제주도에서도 374명의 주민이 체포됐고, 이들 중 149명이 사찰의 고구마 창고에 수감됐다. 이후 8월 20일, 이들은 섯알 오름으로 끌려와 학살당했고, 두 개의 구덩이에 돌무더기와 함께 암매장됐다.
 
  6년이 지나고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당시, 유골이 뒤엉켜있어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 결국 유족들은 공동으로 부지를 매입해 유골을 안장한 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이름을 붙였다. ‘백조일손’이란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같이 묻혀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그 자손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섯알 오름 학살터 두 개의 구덩이
 
 
  세 번째 이야기, 제주 4.3평화공원
 
  동굴 속으로 몸을 숨겼지만…
 
  제주 4.3평화공원은 4.3의 진실을 기억하기 위해 조성된 국내 최대 규모의 공원으로, 4.3평화기념관과 위령탑, 그리고 희생자 각명비 등으로 이뤄져있다. 그중 가장 먼저 4.3의 발발과 전개, 결과 등 모든 역사적 과정을 전시하고 있는 4.3평화기념관을 찾았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동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굴 내부에 들어서자 몸서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의 총소리가 나더니 이내 비명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희생자들의 고통이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동굴로 조성된 전시실 입구
 
  1948년 11월,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총살하는 등 일명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이 시작되자 진압군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동광리 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 그중 10명을 총살하고 동광리 마을을 불태웠다. 겁에 질린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은 인근 동굴로 몸을 숨겼다. 그 동굴은 제주어로 ‘큰넓궤(크고 넓은 동굴)’라고 불린다. 끈질긴 추격 끝에 진압군은 동굴에 몸을 숨긴 주민들을 발견했고, 동굴의 입구를 돌로 막아버렸다. 돌을 치워 겨우 동굴을 탈출한 주민들은 눈보라를 헤치며 무작정 산을 향해 걸었다. 결국 이들은 ‘볼레 오름’에서 진압군에 총살되거나 잡혔고, 정방폭포 인근에서 학살당했다.
 
  1948년 12월, 다랑쉬마을의 주민들은 ‘다랑쉬굴’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진압군들은 굴 밖에 있던 주민들을 총살한 후 동굴 속에 있는 주민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 동굴 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사시켰다. 희생자는 11명으로, 이 중에는 50대 여성과 아홉 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전시실에는 실제 다랑쉬굴의 모습 그대로를 재현한 동굴이 있다. 동굴 내부에는 놋그릇과 놋수저, 가마솥과 항아리 등 생활용품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유골들이 누워있었다.
 
다랑쉬굴의 실제 모습을 재현한 동굴
 
  그들의 몸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
 
  전시실의 마지막 코스로 다다랐을 무렵, 4.3 당시 신체적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모습이 한쪽 벽면에 적나라하게 전시돼있었다. 팔, 다리 할 것 없이 뼈아픈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의 증언도 생생히 담겨있었다.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리는 진아영 할머니는 4.3 당시 거처 앞에서 영문도 모르게 총에 맞아 턱을 잃었다. 그리고 무명천을 늘 턱에 둘렀다. 이후 말도 못하고 소리도 잘 들을 수 없는 불구가 돼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렇게 홀로 쓸쓸히 살다가 2004년 세상을 떠났다.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리는 故진아영 할머니
 
다음은 4.3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총에 맞은 후유증으로 잘 걷지 못합니다. 다리가 퉁퉁 붓고, 허리와 다리를 잘 쓰지 못해 밭에 가서 일을 할 때가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 강명수(1935년생, 한림읍 귀덕리)
 
  “여덟 살 때였습니다.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자 산으로 피신 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후 군인들에게 붙잡혀 심하게 매를 맞고, 추락 후유증으로 팔다리가 마비돼버렸습니다.” - 강순덕(1940년생, 제주시 봉개동)
 
  “무장대들에게 납치돼 끌려갔다가 하루 만에 도망쳐 나왔는데, 경찰에서는 무장대 연락병이라는 누명을 씌우면서 지서에 끌고가더니…. 전기고문, 비행기고문, 코에 물 붓는 고문까지 안 받아 본 고문이 없었습니다. 그때 허리가 비틀어져서 하체를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 고태중(1934년생, 구좌읍 동북리)
 
  “옷을 다 벗긴 상태에서 얼굴을 치마로 둘러씌우고, 경찰 둘이서 장작으로 마구 때립디다. 오른쪽 허벅지 뼈가 틀어진 것은 무릎 꿇어앉으라고 한 후에 군홧발로 밟아버려서 그런 겁니다. 잡혀간 날 저녁부터 꼭 이틀 동안 맞았습니다.” - 고산월(1934년생, 안덕면 상천리)
 
  “군인 네다섯 명이 집 마당으로 갑자기 들어오더니 ‘손들라’고. 그 참에 어머니가 얼굴에 피투성이가 돼가지고 들어오니까, ‘아이고,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면서 어머니를 와락 안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뒤에서 총을 쏘는 겁니다. 총알이 내 오른쪽 엉덩이를 관통해서 어머니 다리에 박혔습니다. 오래 누워 살다보니 욕창으로 살이 썯어서 지금까지도 엉치등뼈가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 김만오(1932년생, 서귀포시 서귀동)

  그들을 기억하는 일
 
  전시실의 출구로 나오자, 벽과 천장에 수많은 사진이 붙어있는 복도를 마주했다. 그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마치 사방에서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었다. 어린 아이부터 연로한 이들까지…. 4.3으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14,231명의 희생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들을 기억하겠노라고 다짐했다.
 
벽과 천장에 사진이 붙어있는 전시실 출구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1947년 3.1절 대회로부터 시작된 4.3은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된 나라를 염원하던 제주도민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제주도민만이 아닌 국민의 염원이기도 했다.
 
  겨울에 핀 동백꽃이 시들지 않았듯 4.3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5.18 발포에 대한 책임자가 처벌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4.3 역시 가해자에 대한 조치가 이뤄진 적은 없다. 아니, 가해자가 누구인지조차 명확히 얘기하고 있지 못하다. 지금까지도 4.3 희생자들을 ‘빨갱이’라고 치부하면서 자신들은 애국을 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단순했다. 분단을 반대했고 평화를 열망했다.
 
  우리는 4.3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값진 희생은 인권이 보장받는 나라, 평화로운 나라로 만드는 밑거름이 돼야 한다. 그날이 오면, 4.3은 대한민국의 온전한 역사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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