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을 대표하는 무협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황비홍>(1991), <동방불패>(1992), <와호장룡>(2000) 등 유혈이 낭자하는 검의 춤사위와 경이로운 권법들의 향연이 머릿속을 차지하는 첫 번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거장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첫 무협 액션 영화 <자객 섭은낭>은 느리고 담백한 수묵화와 같다. 고수의 경지에 오른 주인공 ‘은낭’의 무술 실력은 숨겨진 채 그녀의 마음에 주목하며 영화를 전개한다.

  제68회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제52회 금마장 작품상을 포함하여 5개 부문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 영화는 거장의 품격으로 가득하다. 마치 스치는 바람처럼 영화 <자객 섭은낭>은 서정적이고 사실적이다. 과장된 액션을 최대한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살린다. 세트 역시 야외 공터를 활용한다. 바람소리, 새소리에 집중하다보면 영화의 장르가 다큐멘터리는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평화롭다. 사실 무협 영화와 리얼리즘의 만남은 낯설고도 생소한 조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시도한 무협의 변주는 또 하나의 무협 영화로서 새로운 장을 연다. 이는 주인공 은낭의 내면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최고 자객의 경지에 올랐지만 은낭은 싸움을 할 수 없다. 은낭은 위박 지역의 맹주인 ‘전계안’에게 파혼을 당하고, 가성 공주의 쌍둥이 동생인 ‘가신 공주’에게 맡겨져 무공을 연마하게 된다. 길었던 수련 기간을 통해 최고의 자객이 된 은낭은 아이러니하게도 검을 휘둘러야 할 순간이 오면 암살을 포기해 버린다. 정치적 갈등, 처첩들 간의 음모, 어지러운 도술로 가득한 강호와 은낭은 사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과 다름없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이처럼 무협 영화에서 결코 보기 힘들었던 캐릭터를 주인공을 내세우며 어쩔 수 없이 자객이 되어야 했던 은낭의 마음을 섬세한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시대의 희생양인 은낭을 통해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무술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인간 내면의 또 다른 경지에 다다르는데 성공한다. 현실에 맞닿아 있는 것이 때로는 더 자유로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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