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가 폐교 80주년을 맞았다. 지난 3월, 한국기독교박물관은 폐교 80주년을 맞아 본교가 평양에 위치했던 당시 숭실 캠퍼스가 평양성 내성에 자리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에 본지는 지난 호에 숭실의 발원지가 평양성으로 밝혀진 사실을 보도했다(본지 제1206호 ‘숭실의 발원지, 평양성으로 밝혀져’ 기사 참조). 지난 호에 이어 한국기독교박물관 황민호 관장과 한명근 팀장을 만나 이번 발견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지도 1' 1912년 지적원도(평양부 신양리 중북부/ 국가기록원 소장 M/F)
지도 1: 1912년 지적원도(평양부 신양리 중북부/ 국가기록원 소장 M/F)

 

*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제공한 자료를 일부 발췌했음을 알립니다.

 

  평양은 단군과 기자의 고장으로 예로부터 우리 문명의 발상지로 일컬어져왔다. 이 때문에 평양은 기성고도(箕城古都), 즉 ‘기자의 옛 도성’이라 불렸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경관 때문에 풍류와 명승의 공간으로 유명해 평양을 본 중국 사신들은 ‘천하제일강산’이라 일컫기도 했다. 그리고 전근대 역사 도시, 명승 도시로 명성이 자자한 평양은 근대 이후 개신교 신앙의 중심지, 근대 고등교육의 요람이 됐다.

  평양의 핵심 구역인 평양성(북한 국보 제1호)은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 그리고 북성(北城)으로 구분된다. 이중 내성은 관아와 시가가 집중되어 있었으며 과거 숭실이 위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내성의 동문인 대동문(북한 국보 제4호)은 강변에 자리 잡고 있어 과거에도, 현재에도 평양의 시가가 형성됐던 중심지이며 내성의 서문인 보통문(북한 국보 제3호) 주변은 비교적 지형이 높고 빈 지대가 많은 곳이었다.

  보통문의 오른쪽 언덕은 19세기 말 개신교 신앙의 중심지역으로, 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 거점이었다(<지도 1>의 노란선). 여기에 각종 미션 학교와 병원, 선교사 거주지가 조성됐는데, 숭실은 1897년 10월 보통문 동북쪽에 위치한 장로교 선교기지 내 베어드의 사택에서 출범했다. 1900년 정규 중학과정을 시작한 숭실은 학생 수가 증가함에 따라 1901년 선교사 거주지의 바로 남쪽 아래지역인 평양부 신양리 39번지에 부지를 마련하고 목조 2층 교사를 신축, 교지를 정비해갔다.

  당시 숭실이 자리 잡은 위치는 1912년 측량하여 완성된 축적 1/1,200의 평양 지적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도 1>에서 붉은 선으로 표시된 곳이 신양리 39번지이다. 그 면적은 1920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작성한 기록에 의하면 2만 3천 819평이었다. 그리고 교지 왼편의 푸른 선으로 표시된 곳은 ‘숭실농장’으로, 돈사, 통조림공장, 과수원 등이 있었다. 이후 숭실의 교육 규모가 커짐에 따라 부지도 남쪽으로 점차 넓어져 1938년 폐교 당시에는 붉은 점선 표시까지 확장되었다(<지도 1>의 붉은 점선). 1946년 미육군 지도창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확장된 숭실 부지가 확연히 표현되어 있다(<지도 2>).
 

'지도 2' 1946년 미육군 지도창 제작 지도(미국 텍사스대 도서관 소장)
지도 2: 1946년 미육군 지도창 제작 지도(미국 텍사스대 도서관 소장)

 

  ‘천하제일강산’, ‘기자의 옛 도성’이라고 불렸던 평양성의 내성에 숭실이 위치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한국기독교박물관 한명근 팀장: 중국 사신들이 ‘천하제일강산’이라고 칭할 정도로 평양성에 대한 관심과 찬사를 보내왔어요.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평양성의 실재를 화폭으로 담은 지도가 많이 남아있죠. 우리 박물관에 있는 이 지도는 비교적 평양부의 역사 지리적 내용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숭실이 위치했던 곳이 내성이었고 이외에 중성, 외성, 북성으로 구성된 평양성의 길이는 총 23킬로미터 정도로 길었어요.

  내성의 서문인 보통문은 매우 수려한 지역이었고, 대부분의 시가지는 대동강 근처에 위치했어요. 대동강 근처는 민가나 관가가 밀집돼있을 정도로 발전했죠. 반면 장로교 선교기지와 숭실이 있었던 보통문 근처는 평양부 관아 주변 주역이어서 공터로 남아 있는 곳이 많았고 근대 도시로의 변화와 개발이 더디게 진행되던 곳이었어요. 따라서 근대적인 도시로의 변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1890년대 중반 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이곳을 평양선교지부의 핵심 지역으로 매입을 합니다. 그리고 선교기지 내 베어드 사택에서 숭실의 교육이 시작됩니다. 이곳에서 1897년 가을 13명의 학생으로 ‘숭실학당’ 교육이 시작되고 중학교 관제에 따라 정식 중학교육을 시작하는 1900년이면 30여 명 이상으로 학생 수가 증가했죠. 베어드 사택이 적어서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01년에 부지를 매입해요. 그 곳이 신양리 39번지예요(<지도1>의 붉은 선). 숭실은 1901년 4월 그 땅에 2층 기와 한옥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이 건물이 완성된 그해 가을부터 ‘숭실 캠퍼스’가 독립적으로 형성되었고, 숭실의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숭실 캠퍼스의 시초는 1901년부터였고 그 위치는 옛 지도로 보면 평양성 중에서도 내성에 해당됩니다.

 

'지도 3' 평양의 현재 Google 위성 지도
지도 3: 평양의 현재 Google 위성 지도

 

 

  지적원도는 어떤 지도인가요?

  한국기독교박물관 황민호 관장: 토지를 좀 더 세분화하여 필지별로 구분하고 땅의 경계를 그어놓은 것이 지적도예요. 그리고 복사본이 아닌 지적도의 원본을 지적원도라고 불러요.

  한 팀장: 이 지적원도는 지적도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서 완성된 거예요. 축척을 면밀히 계산하고 모든 조각을 맞추니 이러한 지도가 나온 것이죠. 그리고 1920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작성한 기록에 의하면 신양리 39번지가 2만 3천 819평이었는데요, 이 지적원도를 맞춰 면적을 계산해보니 실제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더라고요.

 

  정확히 숭실의 부지는 어디까지인가요? 장로교 선교기지(노란선)까지 숭실의 부지라고 할 수 있나요?

  한 팀장: 장로교 선교기지는 신양리 26번지인데, 선교사들의 집단 거주지예요. 그래서 숭실의 부지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신양리 39번지인 붉은 선이 숭실의 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도 2>를 제작한 미육군 지도창은 무엇인가요?

  한 팀장: 해방 당시에 정밀한 지도 제작이 국내에서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미육군이 신탁 통치 당시에 군사적 목적으로 지도를 면밀하게 제작했죠. 그 지도를 제작한 게 미육군 지도창 이에요.

 

  미육군이 제작한 지도인데 국내에서 사료로 사용할 만큼 공신력이 있나요?

  한 팀장: 이 지도는 해방 이후 그 당시의 지리를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도예요. 실제로 지도 연구자들도 미육군 지도창의 지도를 인정하고 자료로 활용을 하죠. 굉장히 정확한 지도라고 볼 수 있어요.

 

숭실전문학교 농학과 제2회 졸업생 기념석
숭실전문학교 농학과 제2회 졸업생 기념석

 

  숭실대학은 1925년 한국에 대학을 둘 수 없다는 일제에 강압에 의해 전문학교로 개편됐다. 이후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1938년 3월 평남도청 귀빈실에서 상내(上內) 도지사로부터 폐교인가서를 교부받았다. 이로써 평양 숭실의 자취는 소멸돼갔다. 그 뒤 숭실 부지는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사용했다가 1945년 해방이 된 후, 북조선 노동당 중앙당으로 이용됐다.

  숭실 캠퍼스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사회주의 도시로의 건설 과정에서 건축물은 사라졌고 주변 도로망 및 명칭 또한 바뀌었다. <지도 3>는 현재의 평양 중심지를 위성으로 촬영한 지도로, 숭실이 위치한 곳(<지도3>의 붉은 선)의 동쪽에 대동문, 서쪽에 보통문, 북쪽에 칠성문(북한 국보 제18호)이 있고 동북쪽으로 모란봉의 을밀대와 부벽루가 남아있다. 동남 쪽에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 광장이 있으며, 동북쪽에 만수대의사당과 김일성 동상이 자리 하고 있다.

  이로써 현재 숭실 터에는 옛 숭실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게 됐다. 다만, <지도 3>의 붉은 점선 내 남쪽에 위치한 북한 주재 러시아대사관에서 ‘숭실전문학교 농학과 제2회 졸업생 기념식 수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현재 옛 숭실의 흔적은 숭실전문학교 농학과 제2회 졸업생 기념식 수석 외에는 존재하지 않나요?

  황 관장: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졸업생 기념식 수석 말고는 모두 우리가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흔적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에 숭실 폐교 80주년을 맞아 공식적으로 숭실의 위치를 정확히 규명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팀장: 이거에요. 이거. 지금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 시절 평양의 지적원도는 이 1912년 지적원도가 유일합니다.

 

  최근 남북이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오는 27일(금)에 열릴 ‘2018 남북 정상회담’은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다. 그리고 남측 예술단 평양공연이 16년 만에 가시화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남·북·미 3국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65년간 지속된 정전협정이 한반도 평화협정으로 전환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에 숭실은 ‘통일시대의 통일대학’을 준비하면서 과거 평양 숭실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그 첫 과제는 숭실의 옛 터를 확인해보며 영광스러운 숭실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일” 이라고 말한다.

 

  ‘2018 남북 정상회담’이 오는 27일(금)에 열릴 예정입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번 발견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황 관장: 남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연구를 한 것은 아니에요. 폐교 80주년을 앞두고 이 일을 추진했는데 이렇게 맞아 떨어진 거죠. 이번에 만든 ‘평양 숭실 캠퍼스 가상현실 체험존’ 을 구상할 때도 남북관계가 좋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남북관계가 이렇게 풀린 거죠.

  이번 발견은 평양 숭실의 위치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첫 번째 문건이에요. 훗날 통일이 돼서 우리가 평양으로 간다면, 그곳에 우리의 캠퍼스를 짓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공식적인 근거를 마련하게 된 거죠.

  한 팀장: 예전에 평양 숭실의 모형을 만들었을 때 얘기인데요, 그 당시에 실제로 평양 숭실에 다녔던 분들의 증언을 들었어요. 그분들의 이야기로 고증하고 모형을 만들었었죠. 그분들이 직접 캠퍼스의 평면도도 그려주시고, 건물 위치와 언덕 등 지형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분들의 증언과 당시 사진으로 평양 숭실의 위치를 짐작했었죠. 그때는 이번에 규명된 위치와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제가 평양에 갔는데 건물은 보이는데 제가 생각한 위치하고 거리가 맞지 않는 거예요. 그 정도로 평양 숭실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집착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위치가 궁금하기도 하고, 평양에 가보고 싶기도 하고…. 평양이 우리의 탯자리이잖아요. 우리의 탯자리니까 위치를 발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평양 숭실의 위치가 신양리 39번지라고 명확하게 기록돼있는데, 39번지가 당최 어디인지는 모르겠고. 그래서 평양성의 지적원도를 몇 년 전부터 찾아보려고 했는데 올해 폐교 80주년을 맞아 비로소 찾은 거예요. 그분들이 증언했던 게 다 맞더라고요. 이 지적원도가 정확했죠. 일제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도시정비사업을 추진하면서 매우 정확하게 만든 겁니다. 이 지도를 보고 비로소 ‘평양 숭실이, 우리 땅이 여기 있었구나…’라고 깨달았죠. 이제 알았으니 평양의 옛 숭실 땅을 한번 밟아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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