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와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최고의 수단인 것은 아니다. 여행이 갖는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과거 여행이 ‘최고의 공부법’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유럽, 특히 영국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유럽여행을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고 했다. 그랜드 투어는 주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적지와 르네상스를 꽃피운 나라인 이탈리아, 유럽 전역에서 가장 세련된 예법을 자랑하고 유행의 첨단을 주도한 나라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보는 일정이었다. 그랜드 투어라는 표현은 영국의 가톨릭 신부 리처드 러셀스가 자신의 저서인 <이탈리아 여행>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러셀스는 영국의 유력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이탈리아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러셀스는 자신이 저술한 책을 통해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랜드 투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러셀스의 저서 <이탈리아 여행>은 영국 상류층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그랜드 투어의 열풍을 일으켰고, 그랜드 투어라는 개념은 유럽 전역의 상류사회로 점차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랜드 투어는 유럽 곳곳을 돌아보며 고대 유적을 직접 살펴보고, 당대의 대도시에 머무르면서 살아있는 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짧게 잡아도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했고, 엄청난 액수의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랜드투어의 정의 및 범위에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으로는 브루스 레드포드가 정의한 4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젊은 영국인 남성귀족 혹은 젠트리가 여행의 주체다. 둘째, 여행 전체 일정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가정교사가 있어야 한다. 셋째, 로마를 여행지의 최종 목적지로 삼는다. 넷째, 평균 여행기간은 2~3년 내외이다.) 교통수단이라고 해봐야 마차가 고작이었던 시절에 가정교사를 대동하고, 짐을 나르고 시중을 들어줄 하인, 통역까지 거느리고 여행을 해야 했으니 시간과 예산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음이 분명하지만, 그랜드 투어는 오히려 귀족들에게 자기 집안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자, 상류사회의 일원임을 인정받는 자격조건처럼 간주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랜드 투어를 떠난 이들의 여행경로(영국 귀족을 기준)를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여행을 떠나기 전 배경지식을 먼저 쌓고, 여행의 첫 번째 방문지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상류 사회에서 통용되는 예법과 언어를 배운다. 그 다음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알프스를 넘고,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 로마로 가서 고대 유적지를 돌아본다. 유적지 탐방이 끝나면 피렌체와 피사,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와 고전예술에 대해 공부한다. 그 뒤 나폴리로 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을 돌아보고 베수비오 화산을 둘러본다. 돌아오는 길에는 스위스의 인스부르크, 독일의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뮌헨,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거친다. 1840년대 이후 철도여행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여행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배운다는 개념은 상류층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우리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전 시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빠르고 안전하게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여행에 드는 경비 또한 저렴해져 꼭 부유한 사람만 여행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새로운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의만 있다면 그 무엇도 방해가 되지 않는 현재, 여행지에서 배움을 얻는 나만의 그랜드 투어를 계획해본다면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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