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중에도 곱씹어 생각해 보면 이상하게 여겨지는 용어가 있다. 대표적으로 ‘대예배’, ‘당신’, ‘불신자’가 그러하다. ‘대(大)와 소(小)’는 무수한 단어를 만들어내는데 참여하고, 이들 단어쌍은 하나의 짝을 이루어 대립하는 반의 관계(반의어)로 엮인다. 비근한 예로, 성인은 ‘대인’이라 하고 어린이는 ‘소인’이라 한다. 규모가 큰 예배실은 ‘대예배실’이라 하고 규모가 작은 예배실은 ‘소예배실’이라 한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소짜’, ‘중짜’, ‘대짜’ 중에서 고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예배’가 있으니 ‘소예배’도 있는 걸까? 그럴 리 없다. ‘대예배’는 ‘규모가 큰 예배’, ‘많은 사람이 출석하는 예배’라는 의미 외에, 그래서 ‘더 중요한 예배’, ‘더 가치 있는 예배’라는 의미까지 연상된다. 예배의 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태도가 ‘대예배’라는 용어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큰 예배와 작은 예배가 따로 없고, 더 중요한 예배나 덜 중요한 예배도 존재할 수 없다. 보통 오전 11시나 11시 30분에 시작되는 예배를 ‘대예배’라 부르지만, 이를 이질감 없이 사용한다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냥 오전 11시 예배, 오전 11시30 분 예배, 오후 2시 예배라 부르거나 1부 예배, 2부 예배, 3부 예배 등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

 어머니가 쓴 기도문을 보면 종종 ‘당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오랫동안 너나없이 사용하다 보니 자신이 믿는 신을 향해 기도하면서 ‘당신’이라 말하는 것이 관례나 관습으로 굳어진 듯하다.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므로 ‘당신’은 3인칭 재귀 대명사가 아니라 2인칭 대명사이다. 

 문제는, 사전의 뜻풀이와 달리 한국어에서 ‘당신’이 청자를 그다지 존대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당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말했다고 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자를 존대하기 위해 ‘당신’이라 말하지 않는다.하물며 청자가 내 말을 듣고 있다고 믿는 상황에서 ‘당신’이라고는 더더욱 말하기 어렵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를 내 앞에 있는 아빠에게 말하는 것으로 상황을 바꿔보면, “아빠, 당신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가 된다. “하나 아버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을 엄마에게 말하는 것으로 바꿔보면, “엄마,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이 된다. 면전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 편지라 가정하더라도 다소 어색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의로운 일을 하다가 고인이 된 이를 기리기 위해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 수 있다. 여기에서 ‘당신’은 화자와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고 가치 중립적으로 느껴지는 격식체, 문어체적 용법이다. 그러나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아버지일 만큼 친근한 분이다. 그런 분에게 ‘당신’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주신...”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종교를 갖는 것은 신의 존재와 사역을 믿는 개인의 자발적인 믿음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내가 믿는 신을 상대방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향해 ‘불신자’라 부를 수 있을까? ‘불신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이기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라는 의미를 환기한다. 나의 신을 믿는 사람만이 ‘신자’이고 나의 신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나머지는 ‘불신자’라는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는 이웃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것이 본령인 기독교의 가치관에도 반하는 것이다. 특정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개인의 선택일 따름이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