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금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본지는 성차별 및 성 소수자에 관한 이슈들을 보도하곤 한다. 하지만 매번 느껴지는 것은 기사 전개에서의 망설임이다. 과연 우리가 성차별을 기사 내의 단정적인 문장으로 표현해도 독자들에게 어색함 없이 전달될지 고민이 된다. 이는 성차별과 성 소수자 등에 관한 이슈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의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관한 보도를 예로 들자.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관한 보도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분노를 자아내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복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대학가만 보아도 당장 장애인 관련 복지가 잘 돼있는 학교는 수상을 받곤 하니 그들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소수자란 느낌이 강하게 든다.


  반면 성차별이나 성 소수자들에 관한 보도는 다르다. 그들에게 벌어진 피해 사실의 탓을 그들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으며, 성 소수자들에게 복지(제3의 성 화장실 등)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상은커녕 비아냥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성차별의 피해자나 성 소수자들은 우선 약자라는 인식이 사회 속에 만연한 것은 사실이다. 즉 그들의 어떠한 특성으로 인해 사회 속에서 피해나 억압을 받는 일이 많단 것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지되고 있단 것이다.


  이처럼 약자 인권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고 해서 원인을 분석하고 싶진 않다.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여론 차가 발생했는지 논하는 것보단 앞으로 어떻게 차이를 없애고, 사회적 약자 문제에 사회 전반이 나서 해결할지를 말하는 게 발전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조금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약자를 억압하는 구조는 개인적 차원에서 우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2차 가해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어 개개인이 약자를 도우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도적·관습적 차원의 억압을 해결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수자나 약자들이 갖는 ‘약점’들은 본인의 잘못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우가 적으며,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누구나 우연히 약점을 갖게 될 수 있다. 이에 미래의 자신 혹은 가까운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소수자 인권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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