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좋은 것을 합의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좋다고 합의한 것을 짊어지며 살아간다. 어휘는 비슷하면서도 꽤 큰 차이가 있는 말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냐 혹은 ‘합의된 것’이냐의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특히 국민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소수자에 관한 일들일 때 그러한 차이에 대해 통감하게 된다.


  ‘합의’라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루는 가장 큰 원칙인 민주주의의 강점이지만 한편으로 염증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대의에 자신의 의견을 행사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의견이 반영된 일이기에 그 대의의 결과가 어떻든 고스란히 개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며, 다수결의 폭력과 같은 것이 드러날 때도 더러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개인의 의견은 비단 직접적으로 본인에게 관련된 것에만 행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대다수의 일뿐만 아니라 다소 소수자에 한정된 사안마저 대의로 결정하곤 한다. 이에 말 그대로 소수자인 만큼 그 대의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소수자의 의견이 소외되기 쉬워지고 만다. 물론 그 소수 당사자들의 의견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없단 것은 아니다. 단지 이는 정책 제정 과정에서의 맹점이기에 충분하다. 특히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린 좋은 것을 ‘합의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맹점들이 겹치고 겹쳐 이번 장애등급제 폐지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장애인들의 불만을 수용하고 정책을 개정하고자 했던 의도는 좋았으나 결국 당사자인 장애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된다면 실질적으로 그 개편은 개편다운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이어 이는 장애인등급제뿐만 아니라 여타 소수자들을 위한 법이나 정책 제정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소수자를 위하는 척하며 다시금 다수의 폭력을 휘두르는 꼴이 된다는 얘기다.


  이에 우리가 이루는 합의에 조금 더 융통성을 가져야 한다. 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펼친다면 그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정책은 그들에게 좋은 정책이 아니라 우리가 오만스럽게도 좋을 것 같다고 합의한 정책이란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정책에 직접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합의된 대의의 끝자락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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