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학생들과 수업을 한 적이 있다. 도움 받을 수 있는 기자재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면 되겠냐고 물었다. 프랑스 노래, 샹송을 하나 들려주면 된다고 했다. 한 시간가량 노래를 들었다. 그들이 리듬을 따라 흥얼거렸다. 나는 지겨웠다. 창문가로 가서 떨어지는 벚꽃들을 바라보았다. 수업이 끝나자 한 학생이 다가와 샹송의 한 소절을 천천히 읊었다. “Je vous aime” 발음이 괜찮았다. 뜻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사랑합니다”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뜻을 아는가?” 그가 대답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소리다. 좋은 가수다. 그래서 뜻을 알게 되었다.” 

  노랫말 중에 이런게 있다. ‘사랑이란 말은 너무 너무 흔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녕 사랑하기에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건 ‘너무 너무 흔해도’, 매번 세상의 처음처럼 떨리는 순간이다. 그 학생은 사랑의 그 떨리는 순간을 낯선 언어 속에서 파악했고, 나에게 일러주었다. 학생들은 샹송을 들으며 아침인사 ‘Bonjour’ 와 저녁인사 ‘Bonsoir’까지 스스로 구별했다. 나는 그들의 앎에 가닿지 못했다. 정녕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어째서 닿을 수 없는 앎의 방식이 그렇게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은 ‘Bonsoir’의 부드러운 발음에 깃든 일몰의 고즈넉한 햇빛과 어둑해진 공터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저녁 시장에서 떨이 채소들을 사려고 기웃거릴때는 주인아저씨에게 ‘Bonjour’보다 ‘Bonsoir’라는 인사가 제격일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가르쳐 주기 전에 ‘좋은 저녁이네요’라고 인사하며 웃었다. 나는 그들의 앎의 방식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다. 다만 언어는 자의적으로 생겨 난 것이라고 배웠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에는 프랑스어를 설명해주지 못했고, 나중에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대신 학생들은 언어를 음미하는 방식을 전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벚꽃도 다 졌는데,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학생이 자신의 꿈 얘기를 했다. 그가 어떻게 꿈을 꾸는지 상것처럼 궁금했다. “선생님, 뒤에서 누군가 제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었어요. 그 손길의 촉감이 모든 슬픈 사람들처럼 슬펐어요. 많이 슬퍼서 꿈 속에서 울었어요.” 눈에도 길이 있으니 손에도 길이 있을까. 나는 그 울음을 알기 위해 언어 너머 여태 문학을 공부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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