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말 그대로 수용소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한 겨울의 수용소는 가혹하다. 성애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 끼고 밥은 저질 빵과 수프 하나뿐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야외의 작업장에서 일해야 하며 간수에게 잘못 걸리면 죽을 수도 있는 곳이다.

 “이런 제기랄, 겨우 27.5도밖에 안 돼”

 그러나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사람들은 영하 27.5도를 “겨우”라고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극한 상황에서 이들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래를 기준으로 수용소의 인물을 나누자면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미래가 확실한 인물과 미래가 불확실한 인물로 말이다.

 수용소에 오기 전에 해군 중령이었던 ‘부이노프스키’는 간수에게 항의한 죄로 새벽에 중영창에 들어가야 한다. 소설에서는 그가 죽거나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중영창에서 나올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의 앞에는 확실한 파멸이 존재하고 있다. 이곳에서 확실한 미래란 대게 이런 식이다. 좋은 방향으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몇몇 사람은 행운을 누리며 다른 사람들에 비해 풍족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행운에 불과하다. 수용소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사회에서 잘 나가던 사람들이었다. 작업 반장인 ‘추린’은 군대에서 장교로 성실하게 복무하였고 담배를 구걸하는 ‘페추코프’도 한때는 고위 관료였다. 결국 수용소에서 확실한 것은 “일요일 다음에는 월요일이 온다” 식의 것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인물에게 남은 것은 불확실한 미래뿐이다. 그들은 간수들과의 연줄도 없으며 밖에서 보내주는 소포 또한 없다. 그렇다고 당장 내일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당장의 현실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먹을 것을 챙기고 작업장에 일하러 가며 남는 시간에 부업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결국 수용소에서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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