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높아지면서, 우리는 소위 ‘공공미술’ 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다양한 프로 젝트를 일상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미술이란 더 이상 미술관이나 전시회 같이 제한적 문화 공간에서나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나라 전체가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에 미술은 가진 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에 다름없었다. 개인의 사적공간이던 대중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이던 간에 미술품을 들여다 놓는 것은 호사였고, 미술에 관련된 창작법이나 이론·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처럼 여겨졌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술에 대해 무지했고 또 관심이 없었다. 혹자는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쓴 어느 시인의 말을 빌려와 ‘가난하다고 해서 미술을 모르겠는가’라고도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기본적으로 옳은 말이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를 자기만의 방법으로 표현해내는 것과 이에 대해 공감하고 함의를 찾아내는 것. 이는 우리 인간의 의미론적 행위 중에서도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며 우리 안에 내재된 본능이기도 하다.

 
  다만 일련의 주장에 대해 필자 개인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보태자면,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삶의 여유가 없으면 미술(모든 의미의 예술)이 발전·유지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말하고 싶다. 이에 대한 근거로 대중에게 익히 잘 알려진 동화 한 편을 이야기해보겠다. 우리 중 상당수가 영국의 소설가 ‘위다’가 쓴 아동문학 작품 <플란더스의 개>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나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플란더스의 개>는 가난한 우유배달 소년 ‘네로’가 대성당에 모셔진 성화(聖畵)를 그린 거장(巨匠) 루벤스처럼 자기도 위대한 화가가 는 것을 꿈꾸지만, 재능이 뛰어나고 피나는 노력을 했음에도 가난 때문에 그 재능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다. <플란더스의 개>는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문제를 드러내는 아동문학 작품이지만,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부재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도 봄직하다. 문화예술이 진정 빛을 발하려면, 문화예술 창작자들이 계속해서 창작에 임할 수 있으려면 물질적·사회적 안정과 지원 또한 무 시해선 안 될 요소인 것이다.

  일상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기 마련인 ‘공공미술 작품’ 하나가 완성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만족시키기까지, 우리의 윗세대는 ‘미술 없는 일상’ 을 거쳐 와야만 했다. 작게는 공공화장실에 걸린 명화의 모작(模作)에서 부터 크게는 광장이나 공원에 설치된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공공장소 속의 미술’은 우리에게 문화적 가치의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을 일 깨워주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허나 ‘공공장소 속의 미술’이 우리에게 언제나 아름다운 경험만을 선사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중과의 소통 없이 무턱대고 미술작품 선정 및 예산집행을 단행해 해당 장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무지 맥락을 알 수 없는 조형물을 설치해놓곤 ‘공공을 위한 미술’을 했노라 자부하는 공직자들도 있다. 미술의 가치는 미(美) 와 추(醜)라는 이분법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를 불편하게 할지언정 의미 있는 사유를 이끌어내 는 공공미술 작품이라면 응당 환영받아 마땅하다. 허나 ‘공공 미술’을 빙자하여 사익을 추구하거나 치적을 삼으려 드는 이가 없도록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와 ‘모두를 위해 필요한 미술(예술)’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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