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평생을 엉망이 된 채로 살아갈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그들은 우리의 동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내일을 살아가야 하고, 거친 세상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누군가는 내 옆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영우’가 물장구치던 욕조는 그대로 남아있고, ‘도경’의 머리 자국으로 움푹 들어간 베개 또한 여전히 침대 위에 놓여 있다. 

  김애란의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종종 누군가의 실제 경험처럼 읽히곤 한다. 인물들이 실제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글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어느 한 곳이 고장난 사람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애란이 그 모두를 바로 잡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무덤덤하게 그들의 아픔이 담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이야기의 끝을 매듭짓지 않은 채로 둬버리는 경우도 많다. 차가운 현실을 억지로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을 조심스럽게 안아주기도 한다. 어떤 글에서는 주인공이 새 출발을 하며 끝이 나지만, 어떤 글에서는 주인공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모두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적 배경이 여름이 아닌 글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바깥은 여름’이라는 책의 제목은 수록된 모든 글 전체와 잘 어우러졌던 것일까. ‘도화’와 ‘이수’는 크리스마스 날 노량진에 갔지만, 글의 마지막에서 새 시작을 하는 도화에게서는 노량진 수산시장의 비린내도, 겨울의 서늘함도 아닌 산뜻한 초여름의 향기가 났다. 아마 도화의 확신과 자신감에서 흘러나온 향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도 김애란의 인물들이 어디선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들이 글에 나오지 않은 다음 순간에도 역경을 잘 헤쳐나가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소중한 뭔가를 잃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한층 더 단단해지고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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