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비하라의 와붙은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모습이다.
갈 비하라의 와붙은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모습이다.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검정색의 큰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나의 모습을 드리운 눈동자는 미소를 내뿜는다.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나. 이렇게 환한 미소는 여행 전에 마무리하고 오지 못한 일들에 대한 걱정이며 행여나 다른 사람에게 내가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라는 염려를 말끔히 날려준다. 타인의 잡념마저 날려주는 이런 미소는 어떻게 하면 지을 수 있을까. 스리랑카는 진정한 미소의 나라다. 동남아시아라고 부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서남아시아에 포함시키기도 좀 그렇다. 얼마 전 시작한 여행 블로그에 그냥 ‘미소의 나라’라는 메뉴를 만들어 넣어야겠다.
 
  거대한 암석 위에 사랑의 징표를 새긴 시기리야 궁전을 떠나 싱할리 왕조의 고도(古都) ‘폴론나루와’에 도착했다. 도시 자체가 거대한 ‘불교사원의 단지(團地)’라고 하는데, ‘시골’, 그저 시골이라는 단어밖에 생각나는 게 없다. 12세기 때 황금기를 누렸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시골스럽다.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의미 없는 수식어가 생각날 뿐이다. 일당을 주고 고용한 택시 기사와 동행을 해서인지 악명이 높다는 호객꾼이 달라붙지는 않았다. 스리랑카에서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 ‘톱 5’에 선정된 도시여서 그런지 많은 여행 가이드북에는 한국어로 말을 거는 스리랑카 사람 ‘특히 조심’이라는 말이 쓰여 있다.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어 내는 사람에게 ‘특히 조심’이라는 문구는 매칭이 전혀 안 되는데 말이다.
 
  비포장도로 위에 가끔은 코끼리가 출몰하여 위험한 상황을 만들었어도 폴론나루와에 오는 이유는 딱 하나다. ‘갈 비하라(Gal Vihara) 와불(臥佛)’을 보기 위해서다. 이곳의 와불은 이 도시의 상징이며, 스리랑카에서 가장 훌륭한 석불로 인정받는다. 14미터 길이의 와불석상이 19세기 말 영국의 고고학자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온전한 형태로 정글 속에 숨어있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왕조와 왕조가 바뀌는 와중에는 늘 전쟁이 있기 마련인데 길 비하라의 와불은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낸 것일까.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표정만이 그 비밀을 간직한 듯하다. 열반(涅槃)에 드신 부처님은 발가락의 길이가 다르다. 내 눈앞에 계신 부처님은 발가락의 길이가 확연히 다른 것을 확인하고 생전의 모습이 아닌 열반 후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무런 잡념이 없는 무표정. 언젠가부터 희로애락이 보이지 않는 무표정인 상태가 되고 싶었던 나였다. ‘바위 사원’이라는 뜻의 갈 비하라에서 택시 기사의 재촉에도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해가 저물면 야생동물들이 더 많이 출몰하여 운행이 어렵다는 기사의 말에 약 5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랑카틸라카 비하라(Lankatilaka Vihara)’로 이동했다. 갈 비하라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이곳이 오늘 여정의 마지막이라는 ‘기특한 드라이버’의 말에 흔쾌히 동의했다. 옛 시절의 영화(榮華)는 간데없고 폐허나 다름이 없는 이 사원이 고대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더구나 돌기둥 사이에 있는 부처님의 머리는 훼손되어 없어진 상태였다. 머리가 사라져 부처님의 미소를 볼 수 없는 사원에서는 적막감만이 흘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스리랑카 사람들의 환한 미소는 열반에 오른 부처님이 주신 것 같다. 두고 온 것, 안하고 온 것, 못 먹고 온 것, 이상하리만치 이런 잡념이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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