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썰

  유튜브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을 찾아서 들어보자. 헝가리 출신의 위대한 이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17분 정도의 시간을 통해, 우리가 홀로 있음 가운데서 얼마나 큰 축복을 얻을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홀로 있음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가? 고독이 과연 축복이 될 수 있는가? 축복이 어떻게 고독 가운데 내리는가? 신은 어떤 축복을 고독 가운데서만 주시는가?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때때로 외로움을 느끼고, 또 군중 속에 서도 고독을 느낀다. 그런데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외로움(loneliness)’은 홀로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고독(solitude)’은 홀로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고독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철학자 ‘카토(Cato)’는 “우리는 홀로 있을 때 가장 외롭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처절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상황과 정반대의 것이다.

  홀로 있으면서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지 못함을 아쉬워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항상 밖을 향해 있다. 그 영혼이 마주할 누구도 만나지 못하면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홀로 있으면서 마음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명상이래도 좋고 기도라고 해도 좋고 혹은 자신과의 대화라고 해도 좋다. 내가 홀로 있을 때 나는 나를 만날 수 있고, 내 속의 심연을 볼 수 있고, 또 신을 바라볼 수 있다. 독서도 좋다. 이런 것이 고독 속에서 우리가 절대로 외롭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은 축복의 길이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남에 의해 왕따가 되는 것과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남에 의해 왕따가 되는 시간을 스스로 왕따가 되는 시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자의건 타의건 홀로 되는 시간을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고독의 시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주 활동적인 사람도 때때로 함께 어울리던 사람에게서 물러 나와 홀로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생각은 곧 천박해지고 깊이를 잃어버린다. 활동가들도 항상 자신만의 생각의 시공을 가져야만 제대로 된 활동가로 남을 수 있다. 대학의 꼰대들도 좁은 연구실 공간에 처박혀 홀로 시간을 보내다가 놀라운 창조의 순간을 맞는 법이다.

  식당에서의 혼밥도 마찬가지다.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즐거운 시간이지만, 혼밥의 시간도 자신의 세계에 침잠한 이들에게는 축복의 시간이다. 늘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은 저주이겠지만, 자발적인 혼밥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깊이를 모른다. 혼밥하는 사람은 존경받을 이유가 있다. 물론 줄곧 스마트폰만 보며 혼자 밥 먹는 사람은 빼고.

  이제 리스트의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을 들어보자. 그리고 음악이 끝날 때 맞이하게 될 고요한 고독의 시간 을 즐겨보자. 이 가을에 외롭지 않기 위해서.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