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의 제목에 ‘꼰대’라는 말을 넣은 것은 달짝지근한 행복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글을 읽는 순간 잠시 행복감을 맛보지만 우리에게 행복의 길로 이끌어주지는 않는 그런 글들은 참 많다. 우리를 속이는 글들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점에서는 행복의 강박에서 벗어나 뭔가 할 수 있는 일, 행동할 수 있는 무엇을 찾는 것. 그것이 행복의 길일 수 있다 싶어서 썰을 풀기로 했던 것이다. 

  노예는 행복할 수 있는가? 이는 아주 오랜 과거에 살았던 꼰대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물음이다. 노예란 자유가 없는 사람이다. 노예가 부유할 수도 있다. 자신의 욕망을 맘껏 충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노예에게는 궁극적인 자기결정권이 주어져있지 않다. 이 질문은 욕망의 충족 외에도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가 있음을 깨닫기를 바라는 질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착각에 빠져 있는 자유에 대한 생각이다. 만일 그런 자유가 진짜 자유라면 우리는 자유란 우리의 욕망을 마음껏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탐욕일 뿐이다. 문제는, 이 시대가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가 있을 때 자유롭다거나,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다 성취할 수 있는 기반이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런 자유 개념을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유개념’이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혀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열심히 달려가, 거기에서 나오는 달짝지근한 꿀을 빨아들인다. 그 꿀이 참 행복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숲길을 가던 나그네가 호랑이를 만나 도망치다가 길에 나 있는 깊은 웅덩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다행히도 엉겁결에 넝쿨을 잡을 수 있었다. 웅덩이 아래를 보내 큰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넝쿨을 잡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쥐가 나타나 잡고 있는 넝쿨을 갉기 시작했다.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또 그대로 가만히 넝쿨을 잡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 순간 웅덩이 벽에 꿀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가락으로 짚어 입에 넣어보니 그 달콤한 맛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내가 즐기고 있는 지금의 행복이 이런 꿀맛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보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여유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내가 집착하고 있는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가. 

  대학 시절은 여유의 시절이어야 한다. 대학에 와서 학점의 노예가 되고, 대학 생활의 모든 것을 취업에 걸어야 한다면 그것은 대학의 비극이고 시대의 비극이다. 우리는 이 비극의 시대를 스스로 조장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때 꼰대가 해야 하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도 여유를 갖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가 도대체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삶은 비참하며, 삶의 과정 뒤늦게 그런 시간을 가지려 하게 된다. 대학 생활은 어쩌면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된 특혜의 시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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