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 금지 운동이나 채식주의자 관련 상품 증가 등의 동물 보호 이슈들을 보면 잠깐 따듯한 마음이 들다가도 인간의 이중성을 성찰하게 된다. 그렇게 동물을 ‘보호’하자는 태도가 마치 그들의 행복을 인간의 손으로 좌우할 수 있다는 게 전제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가죽을 이용하는 것도, 사육하는 것도, 먹는 것도, 보호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마음이라면 그들의 주체성과 권리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동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비건 패션’을 추구하는 취지는 좋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동물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패션 이외에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동물들을 착취한다. 식생활부터 사냥이나 농사 등 그 분야는 다양하다. 특히 인간의 대부분은 육식을 한다. 채식주의자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육식을 하면서도 동물들을 학대하는 기업에 반감을 갖고 ‘행복한 환경’에서 길러진 식품들을 소비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동물을 행복한 환경에서 기른다고 말하는 것 역시 앞서 말한 ‘보호’와 같은 맥락에서 그들의 주체성과 권리를 훼손한다.


  더 나아가 보자. 우리는 더 작은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그들을 착취한다. 가령 마약탐지견이나 시각장애 안내견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들은 일생을 오로지 스스로의 이름에 붙은 ‘마약 탐지’나 ‘안내’를 위해 살아간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을 학대하는 일은 좀처럼 없겠으나 그럼에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행복한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그런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생명은 아니지 않은가?


  가정에서는 어떨까? 동물과 함께 가정을 가꾼다는 이미지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동물들은 주체성과 권리를 얼마 갖지 못한다. 애초 가정에서 동물과 함께 사는 경우 사람들은 ‘함께 산다’는 어휘를 사용한다기보다는 ‘기른다’는 어휘를 사용한다. 그리고 동물들은 인간의 미적인 호기심에 따라 스스로 원치 않음에도 불편한 의복 같은 걸 입게 되기도 한다. 가정 역시 그들이 권리를 찾고 주체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이에 생각해보아야 한다. 야생 환경은 점점 줄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지구 위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이 주체성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