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수역 폭행사건이 일어난 직후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비난을 하거나 판단을 보류하거나. 사실 최근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에 대한 반응이 이렇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정 반대처럼 보이는 이 두 반응은 판단이라는 공통분모로 엮여 있다. 판단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쾌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최근 판단이 가지는 부담과 제공하는 쾌감의 양은 변화하고 있다. 현대사회가 거대하고 복잡해지면서 판단이 요구하는 능력이 개인의 그것을 초월해 버렸다. 가짜 정보는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가짜 정보는 최저임금과 같은 복잡한 정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판단력을 소진시킨다. 속고 속이는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면 결국 우리는 그 어떤 정보도 신뢰하지 않게 되며 판단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한다. 판단하기를 멈추거나,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쉽게 재단하거나. 이런 측면에서 비난과 보류라는 두 반응은 쾌락주의자와 금욕주의자의 선택이다. 판단을 포기한 사람들은 금욕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판단을 포기하지 않고 쾌락을 좇는 사람들은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쾌락주의자들은 금욕주의자가 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쾌락주의자들의 판단은 현실 왜곡에 기반한 판단이다. 아무리 재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건이 요구하는 판단 능력은 개인의 능력을 초월했다. 쾌락주의자들은 쾌락을 좇다 현실을 마주하고 금욕주의자들과 같이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금욕주의자가 되는 순간 우리 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마주한다. 디스토피아의 정의는 ‘행복하냐, 불행하냐’가 아닌 비판적 사고 능력의 부재에 있다. 사람들이 판단을 중지한 채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바로 디스토피아인 것이다. 소설 “1984”는 공포로 지배되는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판단을 멈출 것을 강요 받는 것을 경고했으며 소설 “멋진 신세계”는 쾌락으로 지배되는 사회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쾌락에 젖어 판단을 하지 않도록 회유되는 세상에 대한 경고를 날렸다. 1984나 멋진 신세계와 달리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그만두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디스토피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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