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썰

  “나는 지금 행복한가?” 이는 우리를 난감하게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보통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잘 하 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게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비로소 그런 질문을 내게 던져보게 된다. 그런데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하버드 대학의 꼰대 ‘벤-샤하르’는 말한다. 왜 그럴까?

  “나는 지금 ~하다”라는 말은 현재의 상태를 묻는 말이다. 마치 현재가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시간은 정지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은 항상 흐른다. ‘지금’ 혹은 ‘현재’라고 불리는 순간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 같지만, 그 내용은 항상 변한다. 그래서 오래전에 살았던 서양의 꼰대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강물에 발을 가만히 담그고 있기만 해도 그 발을 스치는 물 은 항상 다르다. 발은 그대로라도 물은 항상 흐르기 때문이다.

  현재가 영원히 그대로 존재하기 라도 할 듯이, 스스로 지금 내가 행복하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 지금 행복해도 바로 다음 순간에 불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다. 벤-샤하르는 행복은 ‘상태’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한가?”가 아니라 “어제보다 오늘 내가 더 행 복한가(happier)?”라고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행복’이라는 말은 여전히 애매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묻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어제보다는 오늘 이 좀 더 충실했는가?”, “오늘이 어제 보다는 더 만족스러운 하루였는 가?” 그런데 ‘충실’이나 ‘만족’이란 말은 어떤 기준을 전제한다. 그래서 “내가 정한 기준에 오늘 더 부합한 삶을 살았는가?”라고 물어야 할 수도 있다. 더 구체적으로 “나는 오늘 더 진실했는가?”, “나는 오늘 더 절제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고, 어제는 이미 지난 시간이다. 이미 지났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늘,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그리고 그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건져 올릴 수 있는 낚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지극히 값있는 금’과 같은 것이다. 시간은 오직 지금을 통해서만 내가 만날 수 있다. 지금이 나의 인생이라는 시간을 만날 수 장소이며,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열쇠다. 그래서 ‘지금(present)’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present)’이라 고 한다.

  내일로 미루는 삶은 결코 자신의 삶을 사는 삶이 아니다. 자신의 삶은 현재에서 만나는 것이다. “오늘이 좀 더 나은지?”를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 다. 그리고 오늘이 더 낫도록 만드는 노력이 중요하다. ‘노오력’이라고 빈정대도 결국은 노력밖에 주어진 무기 는 없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그러나 내가 일을 할 수 있는 때는 오늘의 해 아래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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