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먼 옛날, 우리 사회는 동성애를 배척하지 않았다.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부부생활 내의 성생활만을 인정하고 다른 성을 배척하여 바라보는 이 분위기, ‘성의 억압’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등장했다. 유독 자본주의가 등장한 18C말~19C 말에 동성애를 네거티브한 관점에서 그리는 책들이 많다. 왜?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가 입장에서, 동성애는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정신병을 가진 사람을 오늘날과 같이 배척하지 않았다. 함께 생활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이 격리되어 수용당하는 정신병원마저 등장하였다. 왜? 역시 마찬가지로 자본가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그래왔듯, 자본가들은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을 상당히 교묘하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치워버린다. 하지만 누군가는 의문을 제기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 하잖아! 인터넷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그래서 나는 한 주제를 꺼내보려 한다. 우리 사회의 ‘노조’에 대한 인식 말이다. 분명 우리는 노조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생각해 보았는가? 노조의 취지는 우리 같은 노동자 계층이 거대자본가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제 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에게 그들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었는가? 바로 언론이다. 뉴스에서는 매일 노조들의 불법 시위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드라마에서는 멋진 재벌2세 주인공이 노조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 나온다. 알게 모르게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변질된 노조들이 문제임은 맞으나, 그 변질된 집단들에 대한 비판과 시정에 대한 기대를 바라지 않고 노조 그 자체를 욕하는 것이 맞는가?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치워지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할 이 시대의 모든 것들을 생각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이자 우리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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