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모이' 엄유나 감독
'말모이' 엄유나 감독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말마저 금지된 혹한의 1940년대, 말을 지키는 일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인물들이 있다. 우리의 말을 모은다는 뜻을 지닌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 편찬에 전력을 다했던 조선어학회의 실화를 모티브로 완성된 영화다.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 회원들을 투옥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모티브로 완성된 영화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맡았던 엄유나 감독의 손을 거치며 투박하지만 정직한 영화로 탄생되었다. 영화는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을 큰 줄기로 선택하지만, 그 줄기를 채우는 대상으로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김판수(유해진)’와 민중들을 선택한다. 영화 속 김판수는 독립에 대한 사명감없이 그저 자식을 위해 사는 평범한 아버지이다. 감독은 말보다는 돈을 모으는 것을 인생에 목표로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말과 글의 힘이 지닌 감동을 극대화한다. 김판수는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을 만나 한글을 터득해 나가기 시작한다. 글을 몰랐던 김판수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눈물을 흘리고, 일제의 눈을 피해 말모이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장면은 그가 개인의 안위를 더 중시하는 인물이었기에 그 울림이 더 크다. 조선어학회의 걸음마는 무장독립운동이 주는 웅장함과 달리 느리고, 정직하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글을 모아 보내준 수많은 개개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도 우리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다. “역사를 바꾸는 건 뛰어난 한 명의 열 걸음이 아닌, 보통 사람의 한 걸음이 모여 나온다”는 <말모이> 속 대사처럼 역사는 보통 사람에 의해서도 움직이기 마련이다. 물론 역사가 곧 스포일러이자, 시각적인 화려함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영화 <말모이>는 착하지만 다소 밋밋한 영화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의병이나 독립군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일제강점기 영화들 속에서 <말모이>는 민족의 얼을 담는 하나의 투박하지만 거대한 그릇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기에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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