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관객점유율 50.9%’, ‘연간 1인당 영화 관람 횟수 세계 1위’. 이는 지난 1월 18일(금)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8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의한 것이다. 지난해 한국 영화는 역대 최고의 극장 매출액을 기록했고, 지난 2011년 이후 8년 연속 한국 관객들의 점유율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영화산업의 상승세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올해는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이다. 이를 기념해 지난 100년간의 한국영화사에 대해 알아보자.


  ‘정치’로 알아보는 한국영화사


  일제강점기 시기의 조선 영화는 일본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돼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단성사’에서는 한국의 첫 영화인 <의리적 구토>가 방영됐다. 이 영화 역시 조선인의 자본과 각본이 일본인의 촬영과 결합해 탄생했다. 조선 영화 중 처음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춘향전(1923)>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동아문화협회’에서 만든 작품이다.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촬영부가 제작한 최초의 영화로는 <장화홍련전(1924)>이 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조선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나, 전체 상영 영화 중 조선 영화는 4%에 불과했고 일본 영화가 69%, 기타 외국 영화(이하 외화)가 27%를 차지했다. 이러한 가운데 1926년에 개봉한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시기의 조선 대중의 울분을 자아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아리랑>은 식민지하에 민족정신을 형상화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작품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은 다양한 규칙과 법 제정을 통해 영화와 공연예술에 대한 통제를 가했다. 한국통감부(일제가 설치한 한국 통치기구)는 1907년 ‘흥행취체 규칙’과 ‘보안법’을 시작으로 1922년 ‘흥행및흥행장취체규칙’을 발표해 영화를 검열하고 무성영화 해설자에 대한 검정을 시행했다. 나아가 1923년 필름검열소를 설립하고 1926년 총독부령으로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을 제정해 검열의 정도를 강화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황국신민서사 △일장기 △전쟁 표어 등을 상영 하도록 했다. 더불어 1940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영화령’에 따라 조선인 제작자들의 활동 허가가 일제히 취소됐고, 조선총독부는 제작사와 배급사를 매입해 조선인 영화사를 강제 통폐합했다. 이는 모든 조선의 기구를 전쟁 수행에 맞도록 조직함과 동시에 일본과 조선 영화 산업 구조를 재편하기 위해 시행됐다. 1941년에 이르러서는 조선어 대사가 포함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전면 금지됐다. 또한 일제는 1936년부터 외화 수입에 제한을 가했고, 1942년에는 외화를 보는 것 역시 전면 금지했다. 대신 총 독부는 ‘영화기획심의회’를 설립해 정치선전과 광고를 위한 선전영화를 제작해 배급했다.

  1945년 조선이 해방된 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시기에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는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다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은 작품과 같은 광복영화가 있다. 대표작으로는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1946)> △이구영 감독의 <안중근사기(1946)> △윤봉춘 감독의 <윤봉길의사(1947)> 등이 있다. 또한 한국전쟁 가운데 남한과 북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이데올로기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에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그린 영화가 제작됐다. 대표작으로 △이창근 감독의 <북한의 실정(1949)> △한형모 감독의 <성벽을 뚫고(1949)> △윤봉춘 감독의 <무너진 38선(1949)> 등이 있다.

  한편 해방과 동시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극장가에는 미국 영화가 자리 잡게 됐다. 미국은 영화를 통해 자국의 정책과 원조 활동을 선전하는데 활용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영토 및 자본의 황폐화로 인해 민간인들이 영화를 제작하지 못해 공공부문이 영화 산업에 참여했다. △군대 △행정기관 △경찰 등의 공공기관들이 극영화를 직접 제작하거나, 촬영에 필요한 인력이나 기자재를 후원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와 같은 공공 부문의 영화 참여와 한국전쟁 직후에 더욱 강화된 미국의 영향력은 반공을 통한 남북한 냉전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활용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처음으로 한국영화 산업 진흥을 위한 움직임으로 ‘입장세법’ 개정이 시행됐다. 1948년 초에 높은 입장세를 부분 인하하고 1954년에는 국산 영화에 한해 입장세금의 60%를 폐지했다. 그리고 1955년부터 1956년까지 국산 영화 면세 정책이 시행되면서 이는 한국 영화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1948년 정부수립을 시작으로 1960년 4·19혁명에서 막을 내린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급속한 근대화와 서구화가 진행됐다. 빠른 정치·경제적인 변화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해 희망을 갖게 만드는 동시에 불안하게 만들었고, 영화관에는 이런 그들의 심정을 담은 영화가 등장했다. 1958년 김소동 감독의 <돈>은 근대 문물을 상징적으로 농촌의 비극적 현실과 도시의 사악함을 중첩시켜 주목을 받았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사이 1년여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근대화로 인해 소외되는 기성세대 및 실업 문제 등의 사회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강력한 리얼리즘 영화로서 현재까지도 한국 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 받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생하게 반영했다. 영화에는 부패한 정권의 모습과 △빈부격차 △실업문제 △이념대립의 문제가 나타나 정부는 상영 중지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한편 1960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자율 영화 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창립됐다. 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가 검열을 시행하는 것에 반발해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심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이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해체되고, 영화법의 시행으로 검열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 시기였던 1962년 1월 제정된 영화법은 영화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겠다는 명목하에, 정치적으로 강력한 통제를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같은 해 3월 공포된 ‘영화법시행령’은 영화제 작업을 등록제로 전환하고 외화 수입 쿼터 제도를 도입했다. ‘외화 수입 쿼터제’란 계몽 및 반공영화 등을 제작한 실적에 따라 외화 수입권을 배정하는 정책이다. 이는 국가에서 영화사에게 특정 내용을 주제로 한 영화제작을 간접적으로 강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화법은 몇 차례의 개정 을 통해 ‘유신 영화법’이라고도 불리는 4차 영화법 개정에서 통제의 절정에 이르렀다. 4차 영화법 개정은 영화사 등록제를 허가제로 전환해 문화공보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3차 개정법에서 사라졌던 외국 영화 수입 쿼터제를 부활시켰다. 더불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해 영화 수급 계획, 제작 수입 쿼터 배정 등의 구체적인 영화정책을 하달했다. 이러한 정부의 극심한 통제는 1970년대 한국 영화의 질적 하락과 산업 침체를 야기했다.

   1979년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통해 문화를 통치수단으로 활용했다. 대중을 3S로 유도함으로써 정치적 무관심을 얻어내려는 우민정책이었으나, 이전보다 통제가 완화된 5차·6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장르의 주제를 영화화할 수 있게 되면서 침체됐던 영화계에 전환기가 찾아왔다. 1984년 5차 영화법 개정은 외화 수입 쿼터를 독점적으로 배정받아 수익을 확보해 온 소수 제작사의 특혜구조를 개편하고 외화 수입 쿼터제 또한 폐지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 영화 시장 육성을 위해 자율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한국 영화 시장 개방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대학 서클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학 영화패를 중심으로 ‘코리안 뉴웨이브’가 형성됐다. 이는 기존 영화의 한계점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영화의 질적 향상을 목표로 진행돼, 해외 영화제에서 중국 5세대 및 대만 뉴웨이브와 비견되는 평가를 받는 성과를 이뤄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포스터

  ‘장르’별로 알아보는 한국영화사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대다수의 영화가 일본의 영향 아래서 제작되는 가운데, 일제에 저항적이고 민족주의 적인 성격을 가진 영화가 일부 등장했다. 대표작으로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 있다. 저항적 예술인 단체인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약칭)’도 저항적 성격을 지닌 4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상영되지 못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군용열차>를 시작으로 친일 협력 영화와 군국주의 선전영화가 제작됐다. 이 영화들은 직접 혹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황국신민화를 내포한 주제로 이뤄졌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에는 ‘광복 영화’와 같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영화가 제작되는 한편 미국의 영향력 증대로 많은 미국 영화가 상영됐다.

   한국전쟁 후에는 ‘기록 뉴스 영화’가 영화계의 핵심 적인 장르였다. USIS <리버티뉴스>, 국방부 정훈국 <국방뉴스>, 공보처 <대한뉴스>등의 뉴스영화가 공보 매체로 제작됐다. 또한 1953년까지 제작된 작품의 대다수는 6·25전쟁을 소재로 했다.

   급격한 근대화와 서구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초반에는 가족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주된 장르를 차지했다. 대표작인 조긍하 감독의 <육체의 길(1959)>은 도시화와 근대화가 이뤄지는 시기 속에서 실업 문제와 세대 갈등을 겪는 아버지의 애환을 담은 작품이다. 가족 이야기를 주제로 한 장르의 유행은 근대화로 인한 변화가 사람들에게 불안과 희망을 가져다 줬음을 보여준다. 1963년 영화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크게 3가지 장르의 영화가 제작됐다. 첫 번째로 전통 장르가 진화한 형태인 △멜로 드라마 △사극 △희극 영화가 있다. 두 번째로는 △스릴러 영화 △액션 영화 △청춘 영화가 새롭게 등장 하며 짧게 유행했다. 세 번째로는 영화법에 따른 외화 수입 쿼터를 확보하기 위해 제작된 반공 영화 및 계몽 영화가 있었다.

   더욱 통제가 강화된 ‘유신 영화법’이 시행됐던 1970년 대에는 다수의 ‘국책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영화진흥공사는 이를 직접 제작했고, 민간 영화 제작사들도 영화시책에 따라 △반공 △새마을 정신 △호국 △멸사봉공 등 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한편 당시에는 △대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하이틴 영화 △홍콩 영화의 영향을 받은 무협장르 △스파이 영화가 인기를 끌었다. 이 열기를 바탕으로 3S정책이 시행됐던 1980년대에는 △역사적 △사회적 △성적 장르 등의 다양한 장르영화들이 방영되며 토대로 ‘코리안 뉴웨이브’를 형성했다. 1990년대에는 ‘기획 영화’와 ‘작가주의 영화’가 등장하며 새로운 장르를 형성했다.

  기획 영화란 한국 영화 산업에 스타를 만들기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바탕으로 마케팅을 강화하는 등 할리우드식 전략을 도입한 영화이다. 또한 감독의 개성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주제와 양식을 가진 작가주의 영화도 유행했는데, 대표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는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이창동 등이 있다.

USIS <리버티뉴스>의 오프닝 장면이다.

  ‘기술적 변화’로 알아보는 한국영화사


  1919년 일본의 영향으로 조선에는 연극과 영화를 결합한 무대극의 일종인 ‘연쇄극’이 제작됐다. 연쇄극은 무대에서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을 영화로 촬영해, 연극과 영화를 교차시키면서 진행된다. 한국 최초의 영화라고 알려져 있는 <의리적 구토>도 이에 해당된다.

  일제강점기 중 1920년대 초반에 시작된 ‘무성영화 시기’는 한국 영화사 최초의 전성시대로 불린다. 이때 40여 개의 제작사가 활동했으며 8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됐다. 무성영화 시기에 영화의 소리는 △현장 음악 △연주 △변사를 통해 전달됐다. 변사는 무성영화의 해설자로, 조선의 판소리 공연 문화와 통독 문화가 이어져 영화에 적용돼 나타났다. 무성영화는 1935년에 영상이 상영될 때 음성 및 음악이 나오는 발성영화로 발전했고, 조선의 첫 발성영화는 <춘향전>이다.

  유성영화 시기에는 ‘영화기술개혁론’과 ‘기업화론’이 떠올랐다. 영화기술개혁론은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게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기재가 필요하다는 요구로 생겨난 것이다. 소음을 최소화해 명확한 사운드를 제공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장비들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또한 제작비가 두 배 이상 상승하면서 영화 제작을 기업화해야 한다는 기업화론도 등장했다. 이에 따라 촬영소가 설치되고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발성영화 제작 이후 한국 영화의 오랜 과제 중 하나는 ‘동시녹음’이었다. 발성영화는 1935년 이후 제작돼 왔지만 한국 영화의 기술적 결함으로 인해 후시녹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고, 1980년대 초에 비로소 동시녹음이 정착됐다. 후시녹음은 영화를 모두 촬영한 후 편집된 영상을 보면서 △대사 △내레이션 △음향효과를 넣는 방식이다. 이는 현장의 모든 소리를 하나하나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현장감을 부여하기는 어렵기도 했다.

  소리뿐 아니라 스크린 부문의 성장도 있었다. 더 넓은 스크린으로의 변화는 관객들이 보다 생생하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1962년에 시행된 스탠다드 비율에서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비율로의 변화는 그 첫 번째 변화였다. 이는 한국 영화가 제작된 이래로 이어져 온 1.33:1(가로:세로)의 비율이 2.35:1의 와이드 스크린으로 변경된 것을 의미한다. 또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시네마스코프에 컬러영화가 도입됐다. 이렇게 이어져 온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는 1970년대에 ‘테크니스코프(techniscope) 방식’의 도입으로 또 한 번 성장한다. 일반적인 영화는 4개의 퍼포레이션(perforation, 영화필름의 양쪽 또는 한쪽에 뚫려 있는 구멍)으로 한 화면을 구성한다. 그러나 테크니스코프 방식은 2개의 퍼포레이션을 사용해 한 화면을 구성하도록 해 필름값을 절약할 수 있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현상을 통해 다시 확대해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을 구현할 수 있어 다른 촬영 기법에 비해 경제적인 촬영 기법으로 다수 활용됐다.

저작권자 © 숭대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