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보는 3.1운동
신문으로 보는 3.1운동
  • 김이슬 기자
  • 승인 2019.03.04 00:45
  • 호수 1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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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기획

1919년 3월 1일  7개 도시에서 시작해 한인이 사는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는 우리 역사를 뒤바꾸는 엄청난 계기가 됐다. 일제에 강점당한 지 9년 만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민족적 혁명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민주 공화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100년이 흘렀다. 탄압과 간섭 속에서도 사실을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신문이 존재했다. 신문은 역사의 그릇이다. 그 당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을 생생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을 통해 1919년 3월 1일, 뜨거웠던 독립운동의 현장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선독립신문’은 1919년 3월 1일 창간된 지하신문이다.
‘조선독립신문’은 1919년 3월 1일 창간된 지하신문이다.

  통감부는 1907년과 1909년에 각각 신문지법과 출판법을 제정해 조선 언론 탄압을 위한 초석을 세운다. 이에 기반해 1910년 조선총독부는 신문발행 허가권을 장악하고, 한국어로 발행되는 민간 신문을 전면 금지한다. 따라서 이때 한국어로 발행되는 신문은 일본의 동화정책을 보도하는 ‘매일신보’가 유일했다. 일본에게 언론의 자유를 빼앗긴 상황에서 3.1운동이 전개됐다. 대규모 독립 시위를 준비한 종교계와 학생들은 민심을 도모하기 위해 전단을 만들고 지하신문을 제작했다. ‘지하신문’은 정상적으로 발간되지 못하고 검열이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배포되는 신문을 말한다.

  3.1운동의 시작과 함께 제일 먼저 등장 한 지하신문은 ‘조선독립신문’이다. 이는 천도교월보사 사장 이종일과 보성사의 사장이던 윤익선이 함께 창간한 신문이다. ‘조선독립신문’은 3.1운동 현장에서 독립 시위에 대한 진행 상황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1일 제1호 발행을 시작으로 발행자가 검거되면 뒤이어 다른 이가 발행을 맡는 방식으로 신문 제작을 이어갔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문 제작에 참여했으나 검거되지 않은 이들은 이름조차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에는 “조선민족대표 손병희, 김병조 외 31인이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조선독립선언서를 경성 태화관에서 발표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경성 탑골 공원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했으며,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은 탑골 공원이 아닌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다. 거사가 있기 전날 조선민족 대표들은 손병희 집에 모여 학생, 시민과 일제 경찰이 충돌해서 희생자가 생길 것을 우려해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민족대표 중 한 명인 김병조는 독립선언의 경위를 해외에 알리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역사적인 3.1혁명은 총 세 곳(△탑골공원 △태화관 △상하이)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당시 탑골공원에서는 약속 시각이 지나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공원에 모여 있던 2만여 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이들과 더불어 고종의 장례식을 보러 나온 시민들이 합쳐서 10 만여 명이 종로와 광화문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주인에게 일본 경찰에 자신들을 신고하게 했다. 경찰에 자진 체포된 이들은 남산 왜성대의 경무총감부에 구금돼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 ‘기미독립선언서’이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 ‘기미독립선언서’이다.

  민족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는 2월 말 서울 보성사에서 시작해 천도교 조직을 통해서 기독교계와 불교계 주요 인물들에게 비밀리에 전파됐다. 또한 학생들이 경의선과 경원선 열차를 이용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전국으로 전달했다. 이로 인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서울을 비롯해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 북한 지역에서도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다. △상해 △용정 △필라델피아 등 곳곳에서 독립 운동 소식을 접한 한인들은 만세 시위를 벌이며 3.1운동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독립운동에 등장한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는 잊힌 이름이 많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당시 신문에 기록된 것 또한 드물다. 실제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2천여 명이지만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례는 3백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조선독립신문 제2호에서는 “가까운 시일에 가(假)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다”라며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창밖으로 시위 모습을 지켜보다가 뛰쳐나왔다. 이들은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거리에 나온 유일한 여학교였다. 체포된 경성여자고등보통 학교 사범과 3학년 최정숙은 판사가 “피고는 여자이면서 어떻게 이 같은 일에 참가했는가?”라고 묻자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독립이라는 것은 조선인으로서 기쁜 일이다”라며 “그러므로 저도 여자이지만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정신여중·고 안에 있는 김마리아 동상이다.
정신여중·고 안에 있는 김마리아 동상이다.

  3월 1일 시위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며칠 뒤인 3월 5일에 전개된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 중에 이화학당과 정신여학교의 학생들이 있었다.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한 유관순은 친구들과 5인의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유관순은 약 20일 동안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인근의 마을을 돌며 시위운동 동참을 설득하며 참여자 포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통해 1919년 4월 1일 약 3천 명이 병천 아우내 장터로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관순은 만세시위 주도자로 지목된 이후 수감돼 온갖 고문을 받고 1920년 9월 28일 감옥 안에서 순국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동경조선여자친목회 회장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옷 속에 감추고 비밀리에 입국해 전국에 3.1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어 김마리아는 3‧1운동의 소식을 듣고는 지속적인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고자 서둘러 상경하여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달려갔다. 이 날은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정거장 (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격렬한 만세 시위를 전개한 날이다. 이날 만세시위에 정신여학교의 학생들도 대다수 참여해 정신여학교에 대한 일본 경찰의 조사가 진행됐 다. 이때 김마리아는 만세시위 지도자로 지목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체포됐다.

 

  끊임없는 외침, 대한 독립 만세

  우리 국민은 3.1운동 이후 지난 100년간 민족의 자존을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1960년 독재 정권에 맞선 4·19혁명 △1980년 군사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위해 벌인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6월 민주 항쟁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 사태에 분노한 국민들의 촛불집회가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그 시대 “누군가”의 희생으로 발전해왔다. “대한 독립 만세” 이 외침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시대의 경계를 허물고 억압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말이었다.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역사에 대한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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